관리자 : 김준석 
입력 : 2015.01.30 07:34 | 수정 : 2015.01.30 13:25
요즘 축구팬들이 가장 궁금한 것은 혜성처럼 등장한 대표팀 스트라이커 이정협(24ㆍ상주 상무)일 것이다. 이정협은 27일 이라크와의 2015 AFC 호주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선제 결승골을 터뜨려 A매치 6경기 3골을 기록했다. 호주에 오기 전까지 그는 A매치는 물론 연령별 대표팀 경기에 단 한 차례도 나서보지 못한 무명(無名)의 선수였다.
왜 그동안 이정협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왜 먼 나라 독일에서 온 울리 슈틸리케(61)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나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일까. 슈틸리케 감독 눈엔 이정협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부산에 사는 이정협의 어머니 배필수(57)씨를 본지가 단독으로 만나서 인터뷰했다.
돈, 명예… 정도(正道)가 아니면 가지 마라
부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진역에서 내려 300m 정도를 걸어가면 이정협이 어린 시절부터 쭉 살아온 집이 나온다. 프로 축구선수가 사는 집 치고는 매우 작은 편이다. 이정협의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이정협의 아버지 이웅재(61)씨는 강원도와 경상남도를 오가는 시멘트 화물선 선원으로 일하면서 20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는다. 이정협의 누나까지 네 가족이 생활하기엔 빠듯한 봉급이다. 이웅재씨는 2주일에 한두 번 집을 방문하는데 오후에 들어와서 다음날 일찍 나간다. 배가 잠시 부산항에 정박할 때에만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동안 이정협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왜 먼 나라 독일에서 온 울리 슈틸리케(61)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나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일까. 슈틸리케 감독 눈엔 이정협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부산에 사는 이정협의 어머니 배필수(57)씨를 본지가 단독으로 만나서 인터뷰했다.
돈, 명예… 정도(正道)가 아니면 가지 마라
부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진역에서 내려 300m 정도를 걸어가면 이정협이 어린 시절부터 쭉 살아온 집이 나온다. 프로 축구선수가 사는 집 치고는 매우 작은 편이다. 이정협의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이정협의 아버지 이웅재(61)씨는 강원도와 경상남도를 오가는 시멘트 화물선 선원으로 일하면서 20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는다. 이정협의 누나까지 네 가족이 생활하기엔 빠듯한 봉급이다. 이웅재씨는 2주일에 한두 번 집을 방문하는데 오후에 들어와서 다음날 일찍 나간다. 배가 잠시 부산항에 정박할 때에만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6일 호주 시드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호주 아시안컵 4강전 대한민국과 이라크의 경기에서 한국 이정협이 헤딩 슛을 성공시키고 환호하고 있다. 뉴시스
이정협이 일찌감치 동래고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사촌형 때문이었다. 동래고에 다니던 이정협의 사촌형이 동래고 박형주 감독에게 “내 친척 동생이 덕천중학교 9번”이라고 이야기했고 마침 이정협을 눈여겨보던 박 감독이 가장 먼저 어머니 배씨와 진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박 감독은 유망주를 스카우트 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어머니 배씨에게 과장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진 않았다. “어머니, 솔직히 제가 ‘이정협을 청소년 대표팀에 넣겠다’ 이런 약속은 못 드려요. 하지만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볼게요.” 어머니 배씨는 “감독님의 그런 진솔한 모습이면 정협이를 맡겨도 되겠다”며 동래고 진학을 결심했다.
하지만 다른 고교 감독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부산의 한 명문고 감독은 어머니 배씨를 수차례 설득하다가 통하지 않자 프로 계약에 준하는 계약금을 제시했다. 이정협의 가족에겐 매우 큰 목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배씨는 “돈 벌자고 아이를 축구시킨 것은 아니다”라며 입학 제의를 거절했다. “당시 그 명문고에 진학했으면 정협이가 일찌감치 빛을 봤을 수도 있죠. 이미 1학년 정협이를 베스트11 주전에 넣어놨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돈이나 명성보단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정협이도 박 감독님 아래에서 축구 외에도 그런 부분들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동래고에 보냈습니다.”
- 이정협이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추자도 할머니댁에 놀러갔을 때 찍은 사진. 이정협의 아버지 이웅재씨와 지동원의 아버지 지중식씨는 모두 추자도 출신으로서 친척 관계다.
동래고 축구부는 1912년 9월에 창단해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전통의 명문팀이다. 1994 미국월드컵 대표팀 감독 김호, 울산 현대 ‘철퇴 축구’의 명장 김호곤, 아시아의 ‘독수리’ 최용수 등이 모두 동래고를 거쳐 갔다. 하지만 부산 지역에 다른 신흥 고교 팀이 많이 생기면서 예전만큼 화려한 명성을 날리진 못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주목을 받았던 이정협은 동래고 1학년 때부터 주전 자리에 설 수 있었고 3학년엔 주장을 맡았다.
당시 동래고는 부산 아이파크의 유스팀(현 개성고)이었다. 대한축구협회는 2008년부터 K리그 각 구단의 유스 선수 발굴을 진흥시키고, 전국 토너먼트 대회 우승에 사활을 거는 부작용을 개선하기 위해 ‘주말리그 왕중왕전’을 출범했다. 전국고교축구선수권과 통합된 이 대회는 명실상부 고교 최강을 가리는 최고 권위의 대회다. 국내 고교 축구의 ‘챔피언스리그’ 격인 이 대회에 나가려면 각 고교는 권역별 리그에서 상위 성적에 들어야 한다. K리그 유스팀이었던 동래고는 2009년 챌린지리그(현 K리그 주니어)에서 3위를 기록해 이 대회 출전 자격을 얻었다.
이정협은 챌린지리그에서 ‘라이벌’을 만나게 된다. 바로 광양제철고(전남 유스)의 동갑내기 스트라이커 지동원(도르트문트)이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는 먼 친척 관계였다. 이정협의 아버지 이웅재씨와 지동원의 아버지 지중식씨는 모두 제주도 인근 추자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중식(56)씨는 “이정협의 아버지 이웅재씨는 내게 형님뻘이다. 형님도 키가 컸고, 나도 키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이라며 “할머니께서 늘 ‘사돈댁 아이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웅재씨도 “우리 집 족보에 나의 고조할머니가 지씨 성을 가진 분이었다고 나와 있다”며 “이정협과 지동원은 촌수로 따지면 9~10촌쯤 되는 친척”이라고 말했다.
- 이정협이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추자도 할머니댁에 놀러갔을 때 찍은 사진. 이정협에게 지동원은 라이벌이자 친척이다. 둘 다 아시아컵을 통해 스타로 발돋음했다.
하지만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는 자리인 만큼 스포트라이트는 늘 지동원이 받았다. 광양제철고는 득점력이 좋은 지동원과 이종호에게 패스를 집중시키는 전술을 펼쳤고 지동원은 늘 탈 고교급 득점력을 뽐내며 팀에 승리를 안겨다 줬다. 광양제철고는 2009년에 챌린지리그와 고교축구선수권 왕중왕전 통합 우승을 달성했다. 왕중왕전 출범 이후 첫 우승인데다가 대회 MVP(최우수선수)를 차지한 지동원은 왕년의 대표팀 스트라이커 최순호를 쏙 빼닮은 선수로 주목받으면서 2011 카타르 아시안컵 무대도 밟았다. 지동원은 카타르 아시안컵 개막 직전 시리아와의 평가전에서 자신의 A매치 데뷔전 데뷔골을 터뜨리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아시안컵 본선에선 4골을 넣었다.
반면 동래고는 필드 플레이어 전원에게 압박을 주문하면서 확 튀는 스타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였던 이정협도 수비 가담에서 ‘열외’일 순 없었다. 미드필더가 한 발짝 더 움직여서 압박을 시작하면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도 모두 압박에 가담하는 것이 동래고의 축구다. 이런 플레이 스타일은 경기 시작 전에 동래고 선수들이 하는 일종의 ‘의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동래고 선수들은 킥오프 전 중앙선 부근에 모여 11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원’을 만든다. 그리고 11명이 동시에 ‘차렷’ 자세에서 오른발을 옆에 있는 동료 왼발에 닿도록 내딛는다. 다시 왼발을 오른발 옆으로 가지런히 모은다. 이는 동래고 상징인 ‘꿀벌’의 협동심을 표현한 의식이다. 동래고는 부산 아이파크의 유스팀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프로팀의 엠블럼으로 교체하지 않고 모교 벌꿀 마크를 가슴에 그대로 달았다. 그 정도로 ‘꿀벌’과 ‘협동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정협도 경기 때마다 이 의식을 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겼다. 때문에 자신이 아무리 최전방 공격수라 해도 다른 동료와 똑같이 압박 수비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정협은 2015 아시안컵을 위해 호주로 출국하기 전에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동원은 늘 저보다 큰 선수였어요. 득점 감각도 훨씬 뛰어났죠. 광양제철고 코치님이 가끔 동원이에게 ‘동래고 9번처럼 제공권이나 몸싸움 본받아라’하는 걸 듣기도 했지만, 동원이는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한 고교 스타였어요. 서로 친척 관계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가까이서 친해질 기회는 없었어요. 그저 동원이가 해외에 나가고 나서도 저희 동래고 친구들이랑 통화할 때 가끔 저와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였죠. 4년 전엔 동원이가 아시안컵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는 걸 지켜보면서 많이 부러워했는데, 이젠 제가 그 자리에 서고 싶어요. 아직 동원이 보다 많이 부족하지만 반드시 넘어선다는 생각으로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대표팀에서 동원이와 당당히 어깨를 겨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싶어요. 그게 저의 호주 아시안컵 목표입니다.”
이정협은 며칠 뒤 호주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가진 평가전(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A매치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그리고 A매치 데뷔전 데뷔골을 넣었다. 지동원이 4년전 아시안컵 개막 직전 평가전에서 A매치 데뷔전 데뷔골을 넣은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삼손’ 김주성부터 시작된 A매치 데뷔전 데뷔골을 넣은 한국 선수는 지금까지 15명. 지동원이 14번째, 이정협이 15번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