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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국제 관계에 구원(舊怨)은 없다.
글쓴이 박명식(44) [ mspark4905@hanmail.net ]
작성일 2021-05-22


[박상후 칼럼] 체스터 니미츠와 알레이 버크─국제 관계에 구원(舊怨)은 없다
펜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前MBC부국장) 2021.05.21 10:09:00

이른바 '욱일기(旭日旗) 이슈'가 뉴스에 다시 오르내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지난 14일 
3.1운동정신을 왜곡하거나 일본제국주의를 찬양·고무하는 행위, 
욱일기 또는 이를 상징하는 軍旗나 조형물을 사용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역사왜곡방지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에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일본관방장관은 5월18일 정례 브리핑에서 
"다른 나라 국회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논평을 삼가겠다"면서도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대해 욱일기 揭示가 정치적 선전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누차의 기회를 통해 설명했고, 
앞으로도 그런 설명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立法 과정에는 반일감정이 충만하다. 
법에 '감정'을 부여하는 나라가 국제사회에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昨今의 한국과 주변정세를 두고 舊韓末의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識者도 있지만, 
사실 그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하겠다. 
구한말은 淸에 대한 사대주의와 쇄국으로 지도층 뿐 아니라 일반 백성도 국제문제에 무지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은 당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인데도 조선의 정서로부터 진전된 게 없기 때문이다.

국제관계는 이익만 있을 뿐이다. '정서' 따위는 없다. 
일본이 한때 군국주의로 치달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그 주동자들이 군사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았지만, 
일본에 그 굴레를 아직까지도 뒤집어씌우고 있는 나라는 없다. 

국제관계에서 우방국과 적국은 끊임없이 바뀐다. 
제1차세계대전 이전까지 일본과 동맹국이던 영국은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일본과 적이 됐고, 
전쟁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옛 동맹을 부활시키고 있다. 
미·일관계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영국 해군의 기함 퀸 엘리자베스.(사진=영국 해군)

對中 포위망 구축에 전세계가 나서고 있다. 
지난 1일 영국 포츠머스港에서는 
포클랜드전쟁 이후 처음이라는 '수퍼 캐리어' 퀸 엘리자베스 항모전투단이 남중국해와 극동을 향해 출항했다. 
21세기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 물러서지 않고 대영제국의 國旗 '유니언 잭'을 다시 올리겠다는 선언이었다. 
미해군의 F-35B을 탑재한 퀸 엘리자베스 항모전단에는 미해군 구축함, 네덜란드 구축함도 합세했다. 
퀸 엘리자베스 항모전단이 닻을 올린 포츠머스항은 
일본이 帝政러시아를 격파한 뒤, 조선과 청나라에서의 이권을 부여받은 조약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근대사에 있어 영국과 일본 두 나라는 인연이 아주 깊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쓰시마(對馬) 해협에서 격파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郞) 제독은 영국 유학파였다. 
도고는 젊은 사관생도 시절 영국해군에 파견돼 
템즈江에 정박 중이던 우스터艦에서 영국의 수병들과 함께 항해술을 익혔다. 
당시 일본제국해군은 그 制服까지 영국해군의 것을 그대로 모방했다. 
해전 당시 도고 제독의 기함(flagship) 미카사號도 영국의 비커스앤맥심社가 건조한 것이다. 
영국 해군박물관의 큐레이터 존 그래이브에 따르면 
도고 제독은 영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겼으며, 넬슨 제독을 존경했다고 한다. 

쓰시마 해전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가 했다는 
"황국의 흥폐는 이번 싸움에 달렸다. 모두가 분발해 노력하라"(皇國の興廢この一擧, 各員奮勵努力せよ)는 말도, 
트라팔가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한 말(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다. 
橫對로 화력을 집중시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멸시킨 그 담대한 'T字 전법'도 
"가장 대담한 조치가 가장 안전한 방법"
(I am of the opinion that the boldest measures are the safest)이라고 한 넬슨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도고는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에 대승을 거둔 뒤 기함 미카사의 깃발을 자신을 키워준 우스터함에 기증한다. 
그리고 우스터함이 퇴역한 뒤 미카사호의 깃발은 영국의 海事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돼 오다가 
지난 2004년 다시 도쿄에 있는 도고신사(東鄕神社)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반환된다.

대일본제국 해군원수 도고 헤이하치로.(사진=인터넷 검색)

영국에서 교육받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미해군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특히 미해군의 영웅 체스터 니미츠와, 국적을 떠나, 같은 해군 소속 신분으로서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한 뒤 메이지 천황은 승리를 축하하는 야외 사교 파티 '엔유카이'(園遊會)를 열어 준다. 
이때 도쿄灣에 정박하고 있었던 미전함 오하이오號에도 초청장을 보내게 되는데, 
미해군의 상급사관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고, 대신 체스터 니미츠 등 후보생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도고 제독은 니미츠 一行에게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이 때부터 체스터 니미츠는 국적을 떠나 해군선배로서 도고를 존경하게 됐고, 
1934년6월에 있었던 도고 헤이하치로의 國葬에도 참석해 弔問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 미·일 양국은 전쟁을 하게 된다. 
체스터 니미츠는 1944년 태평양함대사령관으로서 
필리핀 인근 마리아나해전에서 일본해군을 격파해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마련한다. 
그런데 당시 니미츠의 전법은 도고 헤이하치로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니미츠는 1945년9월2일 미주리艦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전쟁을 했다고 해서 적대시하면 안 된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도고의 쓰시마해전 당시 기함 미카사호가 
극동위원회 소련대표의 폐기주장으로 위기를 맞게 되자 이를 만류한다.

그러나, 이후 요코스카항에 정박돼 있던 미카사호에 
미군을 위한 댄스홀과 수족관이 설치되는등 원형이 크게 손상되자 
체스터 니미츠는 미카사호 보전에 나섰다. 
일본의 유명 월간지 '文藝春秋(분게이슌주) 1958년2월호에 
〈미카사와 나〉(三笠と私)라는 글을 기고하고 원고료까지 도고 元帥 기념보존기금에 쾌척한다. 
이런 노력으로 요코스카港에는 미카사호가 공원형태로 잘 보존되게 됐다. 

일본인들은 한때 적이었지만 도고에게 이토록 우호적이었던 니미츠의 은혜를 잊지 않고 
텍사스 프레더릭버그에 있는 태평양전쟁기념국립박물관에 성금을 보낸다. 
이 박물관은 니미츠 가문이 경영하던 호텔을 개조한 것인데, 
경내에는 도고 제독의 옛날 관사를 본따 만든 서재와 정원도 들어서게 된다. 
도고 헤이하치로와 체스터 니미츠의 인연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일우호의 상징이 됐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이름을 따 명명된 미해군 항공모함 니미츠호는 
도고의 기함 미카사호가 정박돼 있는 요코스카항을 동맹국의 군항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기함 미카사.(사진=인터넷 검색)

미해군 이지스艦의 명칭으로도 유명한 알레이 버크가 맺은 일본과의 인연도 드라마틱하다. 
버크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 함대에서 
구축함 전대장과 기동함대 참모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특히 솔로몬 해전에서 많은 부하들을 잃어가며 일본해군과 격전을 치렀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인들을 'jap'이라 부르며 '황인종 원숭이'로 보는 등, 일본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했다. 

알레이 버크는 1950년 패전국인 일본을 통치하는 점령군의 해군부장으로 일본에 파견됐는데, 
이 때만 하더라도 그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본인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호텔에 투숙할 때도 짐을 객실까지 들어다 주는 종업원에게까지 
"관여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고 한다.

알레이 버크.(사진=인터넷 검색)

그런 그는 어느날 일본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다. 
일본에 單身 부임한 버크는 호텔에서 미군사령부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침대·책상·의자밖에 없었던 호텔객실이 너무 썰렁하다고 생각한 그는 꽃 한송이를 사서 화병에 꽂아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야근을 하고 퇴근해 보니 꽃이 사라져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객실에는 여러송이의 꽃으로 화병이 장식돼 있어 놀랐다고 한다. 
버크가 사연을 알아보니, 호텔의 여성 메이드가 자기 돈으로 이런 배려를 한 것이었다. 
알레이 버크가 꽃 대금을 주려하자 이 여성 메이드는 한사코 거부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여성 메이드의 남편이 바로 솔로몬해전에서 전사한 일본군 군인이이었던 것이다.

알레이 버크는 남편이 전사한 데 대해 미해군장교 출신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여성메이드는 전쟁의 본질이 적을 사살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되는 법이라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알레이 버크는 이 말을 듣고 
개인의 입장을 떠나 사안을 객관적으로 보는 일본인에 대해 생각을 고쳐먹고 
일본을 미워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반문했다고 한다.

이후 알레이 버크는 솔로몬 해전의 일본군 최고사령관이었던 前해군중장 구사카 진이치(草鹿任一)가 
공직에서 추방돼 생활이 곤궁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익명으로 그의 가족에게 식료품을 보내준다. 
그로부터 며칠 뒤 구사카는 버크의 집무실에 나타나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 특히 미국인의 신세는 그렇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알레이 버크는 그런 그에게 더욱 호감을 갖게 됐고, 
입장을 바꿔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땠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레이 버크는 구사카 중장 등 舊일본군 장성 세명을 제국호텔에 불러 식사를 같이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구사카 중장은 친절하게 식사에 초대해 준 알레이 버크를 위해 건배를 제의하면서 
전쟁에서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더라면 버크를 사살해 지금의 인연이 없었을 거라는 덕담이었다. 
이에 대해 버크 역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더라면 구사카 제독을 지금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구사카를 만나고 나서 알레이 버크는 일본에 더욱 호감을 갖게 된다.

마침 당시는 한국에서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공산주의에 맞서는 일본의 재무장이 필요해진 시점이었다. 
알레이 버크는 전쟁이 끝난 이상 일본을 적대시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도와야 한다고 본국을 설득한다. 
그리고 미군이 사용하던 초계기 등의 군사장비를 일본에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1961년 일본해상자위대의 창설을 적극 지원하게 된다. 

알레이 버크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정부로부터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알레이 버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이지스함이 취역하고 5년 후인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이 관에 들어가게 되면 
일본정부가 수여한 욱일대수장을 가슴에 장식해 달라는 유언까지 남기고 영면한다.

한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제국과 교전국도 아니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탄생한 신생 국가다. 
과거 일본과 싸웠던 영국과 미국이 
다시 '전체주의 중국'과 중공에 맞서 일본과 강력한 동맹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도고 헤이하치로와 체스터 니미츠의 인연, 
그리고 일본을 그토록 미워했지만 舊怨을 깨끗이 버리고 극동지역 국제질서 재편에 기여한 알레이 버크의 사례는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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