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지 씨가 제4회 경기도 최고 경기도민 인증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 경기G뉴스 허선량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그어 버린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전선(戰線)입니다. 38선을 지키려고 수많은 호국영령들이 산화했습니다. 제가 38선 횡단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애국애족정신을 효과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크지만….”

지난 6월 24일 오후 3시 경기도 38선 횡단 최다 기록 보유자인 유대지(劉大知·63) 씨를 성남시 분당에서 만났다. 그는 19년간 38선을 80회 횡단해 ‘경기도 최고의 경기인’에 등극한 주인공이다. 올해가 6·25전쟁 정전 60주년인 탓에 그와의 만남은 더욱 의미가 깊다.

유 씨의 자택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자마자 그의 몸에서 땀 냄새가 확 풍긴다. 게다가 얼굴은 1주일간 수염을 깎지 않은 데다 걷고 뛰면서 강행군한 탓에 초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81회째 38선 횡단을 성공한 데 대한 기쁨으로 빛나고 반짝인다.

6·25전쟁 유자녀인 그는 지난 19일 12시 강원도 고성군청을 출발해 인제·양구·화천·철원·연천·포천·파주 등 400km를 6일간 걷고, 달리고, 버스를 통해 24일 11시경 임진각에 도착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울 수밖에…. 이번 38선 횡단 여행은 그의 아내 이순필 씨가 미국의 딸에게 잠시 다녀오는 탓에 홀로 감행했다.

유대지 씨는 “정전 60주년을 맞아 가진 이번 휴전선 155마일 횡단 행사는 전쟁 참상과 가정의 소중함을 국민과 전후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며 “이 마음을 호국영령과 아버지께도 바친다”고 말했다.

‘38선맨’인 유 씨는 ‘전쟁 반대’, ‘아버지’ 등 글씨가 새겨진 모자를 쓴 채 태극기와 유엔기를 단 배낭을 메고 횡단했다. 또 가슴에는 선친의 영정을 두르고 ‘북은 쏘지 말라’는 어깨띠를 해 중간에 마주친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정전 60년의 의미로 철원 백마고지, 노동당사 등 6·25 격전지에 유엔기와 태극기를 60군데 꽂으며 걷고 달렸다. 400㎞ 중 중간에 마지못해 대중교통을 이용한 거리는 250㎞에 불과했다.

◇ 19년간 38선 횡단 때 사용했던 소형 태극기와 선친의 사진. ⓒ 경기G뉴스 허선량

유대지 씨는 기구한 삼대독자·유복자로 파란만장한 인생의 파도를 헤치며 살아왔다. 1949년 3월 건국의 경찰관으로 경북 경주경찰서 안강 지서장이었던 부친은 경관 2명과 순찰하던 중 북한 인민군 빨치산 20명과 교전 끝에 전사했다.

당시 그의 부친은 스물일곱 청년으로 안타까운 요절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국군 토벌대가 안강 인근의 빨치산을 섬멸해 인근 주민의 위험요소를 제거했다. 바로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안강 두류리 전투이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은 그가 세살 때 홀어머니마저 저 세상으로 데려갔다. 결국 그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멸치 행상으로 손자를 키운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는 그에게 영웅으로 자리 잡아 자연스레 애국심이 생겼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체국 다니던 옆집 아저씨가 저를 호로자식이라고 야단쳤습니다. 세살 아래 이웃동생이 놀려 뭐라 했더니 그런 욕을 한 겁니다. 그때는 그 말이 뭔지 몰랐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습니다. 할머니한테 말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가만 안 있었겠지요. 호국영령의 자식이 어째 호로자식인지 정말….”(2011년 6월 1일 조선일보 에세이 특종)

그는 어릴 때 유복자를 비웃는 ‘호로자식’이란 말을 딱 한번 들었다고 했다. 그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을 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이 오늘의 그를 만든 셈이다.

‘호로자식’이란 배운 데 없이 제풀로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후레자식의 사투리다. 우리말 사전은 ‘홀의 아들’이 호래아들의 원말이라고 못박아놓았다. ‘홀의 아들’이란 외짝의 아들, 즉 편모를 일컫는다.

유 씨는 성장 과정을 떠올리며 “한 가정과 가문에 아버지가 없으면 대문이, 어머니가 없으면 방문이, 일가친척이 없으면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다”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대문과 울타리가 없었고, 세 살 때는 방문마저 잃는 비운을 일찍 겪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할머니와 어린 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고 고백했다.

할머니는 가족이 귀한 손자를 22살 나이에 빨리 결혼시켰다. 다행히 부산 동래고를 나온 유 씨는 울산시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일찍 자리 잡아 결혼생활이 가능했다. 그는 딸만 넷을 내리 낳아 할머니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안겼다. 하지만 내심 손자를 기다렸을 할머니는 내색 한번 않고 그가 36살 때 돌아가셨다.

◇ 지난 6월 24일 1주일간의 휴전선 155마일 횡단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는    유대지 씨.   ⓒ 경기G뉴스 허선량

마침내 그는 1994년 6월부터 6·25전쟁 호국영령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38선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그는 늘 아내와 함께 38선을 횡단했다. 아내 역시 친오빠와 시아버지가 국가유공자인 탓에 전쟁의 아픔은 남달랐다.

1994년 그해는 김영삼 정부와 김일성 정권이 핵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까지 우려됐던 때다. 이를 안타까워한 그는 ‘북한 핵개발 반대와 나라의 평화’를 위해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백령도까지 20여일 걸어서 횡단했다. 이 행보가 38선 횡단의 첫걸음이었다.

유 씨의 38선 횡단은 주로 1월 1일, 3월 23일(선친 기일), 6월 25일 등 날짜에 맞춰 매년 서너 차례 이어졌다. 21세기가 시작된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아내와 함께 매달 횡단했다.

또 6·25전쟁 발발 50년이던 2000년 6월 사상 최초로 뉴욕~워싱턴~덴버~샌프란시스코~LA 13개주 4천㎞ 북미대륙 38선을 현지에서 자동차를 렌트하여 횡단하며 세계에 대한민국의 평화를 알렸다. 이로 인해 조선·한국일보 등에 대서특필되면서 유 씨는 ‘38선맨’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는 뉴욕에서 98년형 포드 콘투어 승용차를 렌트해 차 후드에 ‘조국은 통일을 원한다’, 차 양옆에 ‘일제 규탄, 조국 통일’, 차 뒷면에 ‘세계 38선 대륙횡단 대장정’이란 문구를 부착하고 2800여 마일을 가로질러 10일 만에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LA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한국일보 미주판 인터뷰에서 “정신대 문제 등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분단된 조국이 55년 넘게 통일되지 못한 현실을 통탄하는 뜻에서 대륙횡단을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매년 하는 38선 횡단이지만 늘 쉬운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그나마 출발 전날 비가 그쳐 다행이었다. 겨울에는 폭설로 고생하거나, 갑자기 이상기후가 닥치면 으레 고생할 수밖에 없다. 피곤에 의한 졸음운전으로 위험천만의 고비를 넘긴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더욱이 처음 시작할 때와 달리 나이가 들어 체력관리도 중요했다. 그래서 유 씨는 매일 10,000m의 집부근 탄천을 56분에 주파한다.

울산광역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보훈공단에서 정년퇴직한 그는 한때 대한민국 전몰군경유족회 회원부장도 역임했다. 그의 나라 사랑 마음은 유별나다. 그 누구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 가족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탓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회원들에게 공유하는 데 노력한다. 그래선지 6·25전쟁 상이용사의 자녀인 기자에게도 각별한 전흔(戰痕)의 정을 준다.

◇ 유 씨는 인터뷰 도중 이따금 부친과 할머니가 그리운지 한숨을 쉬거나 눈가에 이슬을 머금었다.   ⓒ 경기G뉴스 허선량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젊은이들이 6·25전쟁 발발 연도는 물론 38선과 휴전선의 개념도 잘 모르는데 정말 안타깝더군요. 38선은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이 그었고, 휴전선은 6·25전쟁 이후의 정전선(停戰線)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곧 그들도 알게 될까요?”

유대지 씨는 점차 잊혀 가는 6·25전쟁에 대한 기억들이 안타깝다고 고백했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38선 횡단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지금도 젊은이 못잖은 체력을 유지하는 한 자신 있다고 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내와 함께해 외롭지 않다.

유대지 씨는 지난해 9월 자서전 『나는 호로자식이 아니야』를 펴냈다. 정전 60년을 맞아 준비한 이 책은 전쟁의 참상과 가정의 소중함을 전하고자 할머니와 손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았다. 어린 시절 부모 없이 겪은 성(性)의 무지로 인한 이야기, 할머니의 끝없는 가르침이 담긴 구수한 사투리와 해설이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준다.

유 씨는 “책으로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데 홍보 부족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잘 몰라 안타깝다”며 “그나마 위안은 눈물을 많이 흘렸다, 감동적이었다는 등 독자들의 전국에서  전화를 많이 받는 것”이라고 뿌듯한 마음을 전했다.

한편, 유 씨는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되면 수익금 일부를 유엔참전국 유족에게 기부할 예정이다. 또한 최근 자신의 책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어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반기문 UN 총장,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도 보낼 예정이다.현재그는 중국어판으로 출판이 가능한지 현지 출판사와 상담중이라고 귀뜸해준다. 좋은 결과를 기대해볼만하다.

유 씨는 “아버지의 애국애족과 살신성인 정신을 기려 아버지 동상을 경주시 안강 두류리 전투 현장에 세우는 것이 제 필생의 소원”이라며 “앞으로의 여생을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추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겠다. 국민들도 우리나라 역사와 선열의 애국애족정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동상 건립 5개년 계획도 언급했다.

이어 “하루빨리 진정한 남북평화 분위기가 조성돼 완전한 38선인 황해도 옹진반도까지 달리고 싶다”는 큰 꿈을 내비친 유 씨는 자신을 다스리는 데도 게으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려·전진·정의·불굴·신념.지혜’ 등 육계의 힘을 보태 달라고 매일 새벽 돌다리에서 십분간 명상에 잠긴다.

◇ 1994년 6월25일 38선 횡단을 처음 시작할 때 유 씨 부부가 강원도 양양 38선 기념탑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경기G뉴스(유대지 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