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 안기웅 
| 제목 | 차범근에서 박주영까지 |
|---|---|
| 글쓴이 | 김현포(50) [ kgt0817@hnmail.net ] |
| 작성일 | 2005-07-29 |
온국민 웃기고 울린 ‘천재 골잡이’ 들
축구 역사 다시 쓴 명승부·명장면
그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때 국민을 새벽마다 TV 앞으로 끌어들여 생활 리듬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더니 스무 살 생일날(7월 10일)에는 해트 트릭으로 생일을 자축했다. FC서울의 박주영은 이제 ‘축구천재’라는 수식어만으론 부족하다. 운동장에 설 때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박주영에게는 실력뿐만 아니라 축구 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절묘한 운(運)도 함께 하고 있다.
▲ 분데스리가에서 차붐을 일으키던 당시의 차범근.
박주영 이전에는 이런 짜릿한 감격을 맛보게 해준 스타들이 누구였을까? 물론 없었을 리 없다. 박주영 이전에도 차범근-최순호-김종부-김주성-황선홍-안정환으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의 신동(神童)·톱스타 계보가 있었고, 이들을 최고의 스타로 밀어올린 환상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한국 축구사에 빛나는 ‘그 장면들’을 함께 살펴보자.
한국 치욕 갚은 불세출 스타 차범근
한국 축구가 낳은 불세출의 스타 차범근의 성장과정은 박주영과 매우 흡사하다. 차범근은 경신고 3학년 때인 1971년 국가대표와 청소년대표에 동시 선발, 한국 축구사에 등장했다.
1970년대 한국 축구가 아시아의 강자로 거듭나게 된 계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대통령컵 축구대회, 일명 ‘박스컵’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세계 수준급의 팀을 초청해 벌였던 이 대회는 차범근 허정무 김재한 조광래 이영무 조영증 박성화 등 당대의 스타들에게 풍부한 실전 경험을 제공해줬다.
이 시기 대표팀에는 ‘말레이시아 징크스’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실전 위주의 끈끈한 축구를 구사했던 말레이시아는 뮌헨 올림픽 예선을 비롯해 중요한 경기 때마다 한국의 발목을 잡아채는 만만찮은 전력을 자랑했다. 1976년 9월 11일 제6회 대통령컵 축구대회 개막전에서 한국은 다시 한번 아찔한 순간을 맞았다.
한국의 대표 1진 화랑은 말레이시아의 공세에 세 골을 연속 허용, 0-3으로 뒤졌다. 후반 김진국이 한 골을 만회했지만 다시 추가골을 허용, 후반 38분까지 1-4로 패색이 짙은 상태. 그러나 이때부터 발동이 걸린 차범근은 43분까지 5분 사이 3골을 작렬, 4 대 4의 무승부를 이끌어내며 ‘갈색 폭격기’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고, 이 경기 이후 “한국의 에이스는 차범근”이라는 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12년 뒤. 이미 분데스리가의 수퍼스타로 자리를 굳힌 차범근은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든다. 소속팀 레버쿠젠을 창단 후 처음으로 당시 유럽의 3대 클럽대항전 중 하나였던 UEFA컵 결승에 올려놓은 차범근은 홈경기에서 스페인의 에스파뇰을 맞아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는 극적인 3 대 3 동점골을 터뜨려 5만여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레버쿠젠은 결국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차범근이 유럽으로 떠난 뒤 ‘한국의 에이스’ 자리는 오석재와 정해원을 거쳐 최순호에게 돌아온다. 1979년 17세의 나이로 청소년대표팀의 막내로 처음 선발됐던 최순호는 1980년, 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에서 3골을 터뜨리며 신동의 출현을 알린 뒤 그해 9월 16일부터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전인미답의 A매치 4경기 연속골이라는 신화를 남긴다.
소년 최순호 세계무대 골문 흔들어
▲ 국가대표 시절의 최순호.
엄밀히 말하면 최순호는 대통령컵 대회에서 바레인 태국 등과 경기를 했으므로 이 아시안컵이 A매치 데뷔라고 하기엔 곤란한 부분이 있지만 아무튼 최순호는 국가대표로서 치른 첫 공식 국제대회 아시안컵 대회에서 첫 경기인 9월 16일 말레이시아전부터 19일 카타르전, 21일 쿠웨이트전(2골), 24일 UAE전(3골) 등 4경기에서 7골을 터뜨리며 새로운 스트라이커의 등장을 알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인 대표팀에서 이런 활약을 펼친 최순호가 아직도 미성년자였다는 점. 최순호는 만 19세가 된 1981년, 최인영(GK) 김석원 김삼수 등과 함께 호주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따냈다. 이렇듯 최순호의 당시 활약은 최근의 박주영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다.
박종환 감독이 이끈 청소년대표팀의 첫 상대는 세계적인 강호 이탈리아. 그러나 한국은 1981년 10월 3일 예상을 뒤엎고 최순호의 2골을 앞세워 이탈리아를 4 대 1로 격파해 세계를 놀라게 한다. 이후 루마니아에 0 대 1, 브라질에 0 대 3으로 패하며 예선탈락에 그쳤지만 이날 이후 아무도 만 19세의 소년이 차세대 한국 축구의 희망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최순호는 뒷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의 주역이 됐고 당시 예선 3차전인 이탈리아전에서 최순호가 터뜨린 골은 이 대회의 ‘가장 예술적인 10골’에 뽑히기도 했다.
1980년대 기둥 ‘左주성 右종부’
최순호에 이어 198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끌어간 기둥으로 김종부와 김주성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좌(左)주성 우(右)종부’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먼저 스타덤에 오른 것은 김종부. 1983년 신연호 이기근 노인우 김종건 등과 함께 그 유명한 ‘박종환 사단’을 형성한 김종부는 1983년 6월 15일 멕시코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의 4강전에서 최강 브라질에 전반 14분 선제골을 터뜨리며 전국민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비록 1 대 2로 역전패하긴 했지만 김종부의 골은 결코 낮게 평가되지 않았다.
1985년 고려대 졸업 후 스카우트 파문에 휘말려 설 자리를 잃은 김종부가 1986년의 멕시코 월드컵을 계기로 재기할 수 있었던 걸 보면 멕시코는 김종부에게 행운의 땅이었던 것 같다. 어정쩡한 신분으로 대표팀에 합류해 멕시코로 향한 김종부는 6월 5일 불가리아전에서 후반에 교체 투입돼 천금의 동점골을 터뜨렸다. 1 대 1.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서 첫 승점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한 일간지의 시사만평에는 김종부의 득점 장면을 보며 축구협회와 두 구단이 계약서를 찢고 “다 없던 일로 합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글자 그대로, 김종부는 이 골 하나로 다시 뛸 수 있는 면죄부를 얻었다.
김주성은 1984년에서야 청소년대표에 뽑혔다. 중앙고 재학 당시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명문대들의 입학 제의를 받았지만 “너만 오면 친구들도 모두 받아주겠다”는 조선대를 선택하는 바람에 중앙 무대에서도 멀어졌다. 그러나 승부사 박종환 감독은 김주성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있었다. 1985년 1월 1일.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라는 큰 목표를 앞두고 문정식 감독이 이끌던 한국 월드컵 대표팀(1진)은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88팀과 평가전을 가졌다. 당시 월드컵팀은 최순호 이태호 변병주 조광래 박창선 조병득 등 역전의 스타들이 주축을 이뤘고, 88팀에는 신연호 김종부 김판근 노수진 최진한 등 한창 피어오르는 젊은 스타들이 포진해 있었다.
박종환 감독의 심정은 복잡했다. 상대인 월드컵팀의 구성원들은 바로 1년 전인 1984년 LA올림픽 예선에서 자신이 이끌었던 바로 그 선수들. 예선 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대표 1진 감독에서 물러난 그가 2진격인 88팀을 이끌고 평가전 상대로 나서게 된 것이다. 명분을 떠나 반드시 이 승부를 이기고 싶었을 박 감독은 1-1 동점이던 후반, 감춰두고 있던 김주성 카드를 투입했고 김주성은 하프라인에서부터 단독 드리블로 결승골을 뽑아내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어진 제15회 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 한국은 사령탑을 김정남 감독으로 교체한 월드컵팀과 박종환 감독이 맡은 88팀을 출전시켰다. 이 대회야말로 김주성을 위한 대회였다. 김주성을 앞세운 88팀은 브라질 아틀란티코와 이라크를 연파하며 대회 사상 최초로 한국 팀끼리 결승을 치렀다. 결승전은 월드컵팀의 1 대 0 승리였지만 김주성은 이미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야생마’라는 별명을 낳은 긴 장발과 준수한 외모, 여기에 불우한 가정사정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강원도 속초에서 혼자 기숙사 생활을 했다는 인간승리의 스토리가 더해지며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컵 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월드컵팀으로 숙소를 옮긴 김주성은 마침내 7월 21일 국가대표 데뷔전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 인도네시아전에서 골을 뽑아냈고, 7월 30일 인도네시아와의 2차전에서도 득점해 A대표 데뷔 후 2경기 연속 골을 터뜨리는 성과를 거뒀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뒤 A매치 데뷔전에서부터 연속 골을 터뜨린 선수는 앞서 말한 최순호를 비롯, 김주성 정재권 이천수 박주영까지 5명뿐이다.
‘일본전의 사나이’ 황선홍 1990년대 주름
▲ 2002 월드컵 당시 미국전에서의 황선홍.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은 또 하나의 걸출한 골잡이를 낳는다. ‘황새’ 황선홍은 건국대에 재학 중이던 1988년, ‘너무 마르고 몸싸움에 약하다’는 일각의 비판을 무릅쓰고 이회택 감독의 고집에 의해 대표팀에 선발된다. 일단 이 해 6월 22일, 아시안컵 예선에서 2골을 터뜨린 것이 ‘황새 신화’의 시작. 그러나 정작 화려한 데뷔는 본선에서 이뤄진다.
그를 스타로 만든 것은 12월 6일,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의 일본전. 여기서 선제골 등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그에게는 이후 ‘일본전의 사나이’라는 애칭이 붙는다. 그가 치른 수많은 한·일전 중에서 가장 극적인 승부는 1994년 10월 11일 열린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 한국은 유상철과 황선홍의 득점으로 2-1로 앞서갔으나 후반 41분 일본의 이하라에게 동점골을 허용, 연장전에 들어갈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황선홍은 후반 44분, 번쩍 하는 순간동작으로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이를 직접 차넣어 짜릿한 승리를 따냈다. 비록 이 대회에서 한국은 4위에 그쳤지만 황선홍은 11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일본은 유난히 일본에 강한 그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고, 1999년 J-리그 세레소 오사카에서 뛴 황선홍은 24골로 이 해 득점왕에 올랐다.
최용수와 함께 19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끈 천부적인 골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부상과 월드컵 본선에서의 부진으로 어느새 황선홍에게는 ‘비운의 스트라이커’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지만 축구의 신은 그를 위해 화려한 해피엔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 예선 첫 경기인 6월 4일의 폴란드전. 어느새 34세의 노장이 된 황선홍은 전반 26분 그림 같은 왼발 발리슛으로 폴란드의 골문을 갈랐다.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황선홍을 감쌌다. 이어 터진 유상철의 추가골로 2 대 0. 5차례의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한국이 마침내 승점 3점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황선홍이 있었다. 이 한 골로 황선홍은 ‘큰 경기에서 제몫을 못한다’던 불명예를 날리고 한국 축구사에 영원히 남을 족적을 찍었다.
‘골든보이’안정환 월드컵 신화 주역
▲ 2002 월드컵 16강전에서 기적같은 골든골을 넣고있는 안정환.
물론 한국 축구의 100년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순간은 ‘골든보이’ 안정환의 머리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프로 입단 전까지 큰 명성을 얻을 기회는 없었지만 안정환은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아주대 1학년 때인 1994년 청소년대표에 선발됐고, 1997년 동아시아대회를 통해 A매치 대표로 처음 선발됐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에서는 탈락했다. A대표팀에서의 첫 골이 대표 선발 3년째인 1999년 6월 12일 코리아컵 멕시코전에서 터졌을 정도로, 어찌 보면 안정환은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송곳은 주머니 안에 있어도 고개를 내미는 법. K리그 부산 소속이던 안정환은 이탈리아 세리에A의 페루자로부터 스카우트의 손길을 받아 한국 최초의 세리에A 플레이어가 됐다. 그러나 안정환의 이탈리아 생활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경기에 나설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안정환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애매한 이탈리아 대표팀을 상대로 분풀이(?)를 한 셈이 됐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안정환은 전반 5분, 페널티킥을 실축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이어 한국은 이탈리아의 골잡이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는 등 전반적으로 끌려가는 경기를 펼쳐 “역시 이 이상은 무리인가”라는 한숨을 자아냈다. 그러나 종료 2분 전, 설기현은 황선홍의 어시스트를 가볍게 밀어넣어 90분간의 혈전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어진 연장전. 전반 15분이 지나고 연장 후반전도 단 3분을 남겨 놓은 상황, 안정환은 미드필드에서 올라온 이영표의 센터링에 살짝 머리를 댔다. 환상의 골든골. 이 골은
▲ 골잡이의 역사를 연일 다시 쓰고 있는 박주영.
‘세계 8대 골든골’로 선정됐고, 안정환이 소속됐던 페루자 구단주는 그를 방출하는 유치한 보복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PK 실축-역전의 주역’으로 변신한 안정환의 모습은 지난 6월 16일 경기에서의 박주영의 모습과 사뭇 흡사한 데가 있다.
이처럼 일세를 풍미한 스타들에게 ‘마술 같은 순간’은 그들이 스타로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해냈다. 물론 스타들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기억만 있을 수는 없는 법. 극적인 순간의 기억도 오래 가지만 어처구니없는 실수의 충격이 몇 배 강할 수도 있다. 올드팬들은 아직도 임국찬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1969년 10월 20일,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겨냥한 최종 예선의 한국-호주전이 동대문운동장에서 펼쳐졌다. 한국이 이기면 2승1무1패로 양팀이 동률을 이뤄 월드컵 진출을 위한 마지막 한판 승부를 벌일 수 있는 상황.
1-1 동점이던 후반 20분 마침내 적진 깊숙이 침투하던 이회택이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키커는 가장 킥이 정확하다는 임국찬. 이 페널티킥을 놓치며 한국은 월드컵 진출의 비원을 또다시 가슴에 묻어야 했고 온갖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결국 왕년의 축구 스타는 2년 뒤 쓸쓸히 은퇴와 함께 미국 이민의 길을 떠났다.
물론 실패에 주저앉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타의 조건이다. 지난 6월 16일의 박주영이나 2002년의 안정환이 PK 실축 이후 그대로 경기를 마쳤다면 이들 또한 한동안 씻기 힘든 비난에 시달렸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주저앉지 않았고, 후반의 반전을 더욱 환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을 보여줬다. 물론 그들 개인만의 힘으로 보기엔 힘든 요인도 많았지만, 박주영과 안정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이야말로 진정한 영웅과 거기에 걸맞은 전설을 만드는 원동력임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송원섭 스포츠조선 축구부 기자
주간조선1864호에서 전재
축구 역사 다시 쓴 명승부·명장면
그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때 국민을 새벽마다 TV 앞으로 끌어들여 생활 리듬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더니 스무 살 생일날(7월 10일)에는 해트 트릭으로 생일을 자축했다. FC서울의 박주영은 이제 ‘축구천재’라는 수식어만으론 부족하다. 운동장에 설 때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박주영에게는 실력뿐만 아니라 축구 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절묘한 운(運)도 함께 하고 있다.
▲ 분데스리가에서 차붐을 일으키던 당시의 차범근.
박주영 이전에는 이런 짜릿한 감격을 맛보게 해준 스타들이 누구였을까? 물론 없었을 리 없다. 박주영 이전에도 차범근-최순호-김종부-김주성-황선홍-안정환으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의 신동(神童)·톱스타 계보가 있었고, 이들을 최고의 스타로 밀어올린 환상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한국 축구사에 빛나는 ‘그 장면들’을 함께 살펴보자.
한국 치욕 갚은 불세출 스타 차범근
한국 축구가 낳은 불세출의 스타 차범근의 성장과정은 박주영과 매우 흡사하다. 차범근은 경신고 3학년 때인 1971년 국가대표와 청소년대표에 동시 선발, 한국 축구사에 등장했다.
1970년대 한국 축구가 아시아의 강자로 거듭나게 된 계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대통령컵 축구대회, 일명 ‘박스컵’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세계 수준급의 팀을 초청해 벌였던 이 대회는 차범근 허정무 김재한 조광래 이영무 조영증 박성화 등 당대의 스타들에게 풍부한 실전 경험을 제공해줬다.
이 시기 대표팀에는 ‘말레이시아 징크스’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실전 위주의 끈끈한 축구를 구사했던 말레이시아는 뮌헨 올림픽 예선을 비롯해 중요한 경기 때마다 한국의 발목을 잡아채는 만만찮은 전력을 자랑했다. 1976년 9월 11일 제6회 대통령컵 축구대회 개막전에서 한국은 다시 한번 아찔한 순간을 맞았다.
한국의 대표 1진 화랑은 말레이시아의 공세에 세 골을 연속 허용, 0-3으로 뒤졌다. 후반 김진국이 한 골을 만회했지만 다시 추가골을 허용, 후반 38분까지 1-4로 패색이 짙은 상태. 그러나 이때부터 발동이 걸린 차범근은 43분까지 5분 사이 3골을 작렬, 4 대 4의 무승부를 이끌어내며 ‘갈색 폭격기’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고, 이 경기 이후 “한국의 에이스는 차범근”이라는 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12년 뒤. 이미 분데스리가의 수퍼스타로 자리를 굳힌 차범근은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든다. 소속팀 레버쿠젠을 창단 후 처음으로 당시 유럽의 3대 클럽대항전 중 하나였던 UEFA컵 결승에 올려놓은 차범근은 홈경기에서 스페인의 에스파뇰을 맞아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는 극적인 3 대 3 동점골을 터뜨려 5만여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레버쿠젠은 결국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차범근이 유럽으로 떠난 뒤 ‘한국의 에이스’ 자리는 오석재와 정해원을 거쳐 최순호에게 돌아온다. 1979년 17세의 나이로 청소년대표팀의 막내로 처음 선발됐던 최순호는 1980년, 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에서 3골을 터뜨리며 신동의 출현을 알린 뒤 그해 9월 16일부터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전인미답의 A매치 4경기 연속골이라는 신화를 남긴다.
소년 최순호 세계무대 골문 흔들어
▲ 국가대표 시절의 최순호.
엄밀히 말하면 최순호는 대통령컵 대회에서 바레인 태국 등과 경기를 했으므로 이 아시안컵이 A매치 데뷔라고 하기엔 곤란한 부분이 있지만 아무튼 최순호는 국가대표로서 치른 첫 공식 국제대회 아시안컵 대회에서 첫 경기인 9월 16일 말레이시아전부터 19일 카타르전, 21일 쿠웨이트전(2골), 24일 UAE전(3골) 등 4경기에서 7골을 터뜨리며 새로운 스트라이커의 등장을 알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인 대표팀에서 이런 활약을 펼친 최순호가 아직도 미성년자였다는 점. 최순호는 만 19세가 된 1981년, 최인영(GK) 김석원 김삼수 등과 함께 호주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따냈다. 이렇듯 최순호의 당시 활약은 최근의 박주영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다.
박종환 감독이 이끈 청소년대표팀의 첫 상대는 세계적인 강호 이탈리아. 그러나 한국은 1981년 10월 3일 예상을 뒤엎고 최순호의 2골을 앞세워 이탈리아를 4 대 1로 격파해 세계를 놀라게 한다. 이후 루마니아에 0 대 1, 브라질에 0 대 3으로 패하며 예선탈락에 그쳤지만 이날 이후 아무도 만 19세의 소년이 차세대 한국 축구의 희망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최순호는 뒷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의 주역이 됐고 당시 예선 3차전인 이탈리아전에서 최순호가 터뜨린 골은 이 대회의 ‘가장 예술적인 10골’에 뽑히기도 했다.
1980년대 기둥 ‘左주성 右종부’
최순호에 이어 198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끌어간 기둥으로 김종부와 김주성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좌(左)주성 우(右)종부’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먼저 스타덤에 오른 것은 김종부. 1983년 신연호 이기근 노인우 김종건 등과 함께 그 유명한 ‘박종환 사단’을 형성한 김종부는 1983년 6월 15일 멕시코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의 4강전에서 최강 브라질에 전반 14분 선제골을 터뜨리며 전국민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비록 1 대 2로 역전패하긴 했지만 김종부의 골은 결코 낮게 평가되지 않았다.
1985년 고려대 졸업 후 스카우트 파문에 휘말려 설 자리를 잃은 김종부가 1986년의 멕시코 월드컵을 계기로 재기할 수 있었던 걸 보면 멕시코는 김종부에게 행운의 땅이었던 것 같다. 어정쩡한 신분으로 대표팀에 합류해 멕시코로 향한 김종부는 6월 5일 불가리아전에서 후반에 교체 투입돼 천금의 동점골을 터뜨렸다. 1 대 1.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서 첫 승점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한 일간지의 시사만평에는 김종부의 득점 장면을 보며 축구협회와 두 구단이 계약서를 찢고 “다 없던 일로 합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글자 그대로, 김종부는 이 골 하나로 다시 뛸 수 있는 면죄부를 얻었다.
김주성은 1984년에서야 청소년대표에 뽑혔다. 중앙고 재학 당시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명문대들의 입학 제의를 받았지만 “너만 오면 친구들도 모두 받아주겠다”는 조선대를 선택하는 바람에 중앙 무대에서도 멀어졌다. 그러나 승부사 박종환 감독은 김주성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있었다. 1985년 1월 1일.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라는 큰 목표를 앞두고 문정식 감독이 이끌던 한국 월드컵 대표팀(1진)은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88팀과 평가전을 가졌다. 당시 월드컵팀은 최순호 이태호 변병주 조광래 박창선 조병득 등 역전의 스타들이 주축을 이뤘고, 88팀에는 신연호 김종부 김판근 노수진 최진한 등 한창 피어오르는 젊은 스타들이 포진해 있었다.
박종환 감독의 심정은 복잡했다. 상대인 월드컵팀의 구성원들은 바로 1년 전인 1984년 LA올림픽 예선에서 자신이 이끌었던 바로 그 선수들. 예선 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대표 1진 감독에서 물러난 그가 2진격인 88팀을 이끌고 평가전 상대로 나서게 된 것이다. 명분을 떠나 반드시 이 승부를 이기고 싶었을 박 감독은 1-1 동점이던 후반, 감춰두고 있던 김주성 카드를 투입했고 김주성은 하프라인에서부터 단독 드리블로 결승골을 뽑아내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어진 제15회 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 한국은 사령탑을 김정남 감독으로 교체한 월드컵팀과 박종환 감독이 맡은 88팀을 출전시켰다. 이 대회야말로 김주성을 위한 대회였다. 김주성을 앞세운 88팀은 브라질 아틀란티코와 이라크를 연파하며 대회 사상 최초로 한국 팀끼리 결승을 치렀다. 결승전은 월드컵팀의 1 대 0 승리였지만 김주성은 이미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야생마’라는 별명을 낳은 긴 장발과 준수한 외모, 여기에 불우한 가정사정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강원도 속초에서 혼자 기숙사 생활을 했다는 인간승리의 스토리가 더해지며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컵 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월드컵팀으로 숙소를 옮긴 김주성은 마침내 7월 21일 국가대표 데뷔전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 인도네시아전에서 골을 뽑아냈고, 7월 30일 인도네시아와의 2차전에서도 득점해 A대표 데뷔 후 2경기 연속 골을 터뜨리는 성과를 거뒀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뒤 A매치 데뷔전에서부터 연속 골을 터뜨린 선수는 앞서 말한 최순호를 비롯, 김주성 정재권 이천수 박주영까지 5명뿐이다.
‘일본전의 사나이’ 황선홍 1990년대 주름
▲ 2002 월드컵 당시 미국전에서의 황선홍.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은 또 하나의 걸출한 골잡이를 낳는다. ‘황새’ 황선홍은 건국대에 재학 중이던 1988년, ‘너무 마르고 몸싸움에 약하다’는 일각의 비판을 무릅쓰고 이회택 감독의 고집에 의해 대표팀에 선발된다. 일단 이 해 6월 22일, 아시안컵 예선에서 2골을 터뜨린 것이 ‘황새 신화’의 시작. 그러나 정작 화려한 데뷔는 본선에서 이뤄진다.
그를 스타로 만든 것은 12월 6일,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의 일본전. 여기서 선제골 등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그에게는 이후 ‘일본전의 사나이’라는 애칭이 붙는다. 그가 치른 수많은 한·일전 중에서 가장 극적인 승부는 1994년 10월 11일 열린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 한국은 유상철과 황선홍의 득점으로 2-1로 앞서갔으나 후반 41분 일본의 이하라에게 동점골을 허용, 연장전에 들어갈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황선홍은 후반 44분, 번쩍 하는 순간동작으로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이를 직접 차넣어 짜릿한 승리를 따냈다. 비록 이 대회에서 한국은 4위에 그쳤지만 황선홍은 11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일본은 유난히 일본에 강한 그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고, 1999년 J-리그 세레소 오사카에서 뛴 황선홍은 24골로 이 해 득점왕에 올랐다.
최용수와 함께 19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끈 천부적인 골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부상과 월드컵 본선에서의 부진으로 어느새 황선홍에게는 ‘비운의 스트라이커’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지만 축구의 신은 그를 위해 화려한 해피엔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 예선 첫 경기인 6월 4일의 폴란드전. 어느새 34세의 노장이 된 황선홍은 전반 26분 그림 같은 왼발 발리슛으로 폴란드의 골문을 갈랐다.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황선홍을 감쌌다. 이어 터진 유상철의 추가골로 2 대 0. 5차례의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한국이 마침내 승점 3점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황선홍이 있었다. 이 한 골로 황선홍은 ‘큰 경기에서 제몫을 못한다’던 불명예를 날리고 한국 축구사에 영원히 남을 족적을 찍었다.
‘골든보이’안정환 월드컵 신화 주역
▲ 2002 월드컵 16강전에서 기적같은 골든골을 넣고있는 안정환.
물론 한국 축구의 100년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순간은 ‘골든보이’ 안정환의 머리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프로 입단 전까지 큰 명성을 얻을 기회는 없었지만 안정환은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아주대 1학년 때인 1994년 청소년대표에 선발됐고, 1997년 동아시아대회를 통해 A매치 대표로 처음 선발됐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에서는 탈락했다. A대표팀에서의 첫 골이 대표 선발 3년째인 1999년 6월 12일 코리아컵 멕시코전에서 터졌을 정도로, 어찌 보면 안정환은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송곳은 주머니 안에 있어도 고개를 내미는 법. K리그 부산 소속이던 안정환은 이탈리아 세리에A의 페루자로부터 스카우트의 손길을 받아 한국 최초의 세리에A 플레이어가 됐다. 그러나 안정환의 이탈리아 생활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경기에 나설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안정환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애매한 이탈리아 대표팀을 상대로 분풀이(?)를 한 셈이 됐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안정환은 전반 5분, 페널티킥을 실축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이어 한국은 이탈리아의 골잡이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는 등 전반적으로 끌려가는 경기를 펼쳐 “역시 이 이상은 무리인가”라는 한숨을 자아냈다. 그러나 종료 2분 전, 설기현은 황선홍의 어시스트를 가볍게 밀어넣어 90분간의 혈전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어진 연장전. 전반 15분이 지나고 연장 후반전도 단 3분을 남겨 놓은 상황, 안정환은 미드필드에서 올라온 이영표의 센터링에 살짝 머리를 댔다. 환상의 골든골. 이 골은
▲ 골잡이의 역사를 연일 다시 쓰고 있는 박주영.
‘세계 8대 골든골’로 선정됐고, 안정환이 소속됐던 페루자 구단주는 그를 방출하는 유치한 보복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PK 실축-역전의 주역’으로 변신한 안정환의 모습은 지난 6월 16일 경기에서의 박주영의 모습과 사뭇 흡사한 데가 있다.
이처럼 일세를 풍미한 스타들에게 ‘마술 같은 순간’은 그들이 스타로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해냈다. 물론 스타들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기억만 있을 수는 없는 법. 극적인 순간의 기억도 오래 가지만 어처구니없는 실수의 충격이 몇 배 강할 수도 있다. 올드팬들은 아직도 임국찬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1969년 10월 20일,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겨냥한 최종 예선의 한국-호주전이 동대문운동장에서 펼쳐졌다. 한국이 이기면 2승1무1패로 양팀이 동률을 이뤄 월드컵 진출을 위한 마지막 한판 승부를 벌일 수 있는 상황.
1-1 동점이던 후반 20분 마침내 적진 깊숙이 침투하던 이회택이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키커는 가장 킥이 정확하다는 임국찬. 이 페널티킥을 놓치며 한국은 월드컵 진출의 비원을 또다시 가슴에 묻어야 했고 온갖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결국 왕년의 축구 스타는 2년 뒤 쓸쓸히 은퇴와 함께 미국 이민의 길을 떠났다.
물론 실패에 주저앉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타의 조건이다. 지난 6월 16일의 박주영이나 2002년의 안정환이 PK 실축 이후 그대로 경기를 마쳤다면 이들 또한 한동안 씻기 힘든 비난에 시달렸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주저앉지 않았고, 후반의 반전을 더욱 환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을 보여줬다. 물론 그들 개인만의 힘으로 보기엔 힘든 요인도 많았지만, 박주영과 안정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이야말로 진정한 영웅과 거기에 걸맞은 전설을 만드는 원동력임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송원섭 스포츠조선 축구부 기자
주간조선1864호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