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 김상연 
| 제목 | 육십.. 다시 삼등열차를 타자.. |
|---|---|
| 글쓴이 | 최준태(53) [ jatochoi@hotmail.com ] |
| 작성일 | 2018-01-04 |
육십.. 다시 삼등열차를 타자..
"새해다. 내 나이 오십이다.
이제 더 이상 삼등열차를 타지 않으리라"
어느 가난한 작가가 쉰 살이 되던 새해에
그의 수필집에 남긴 다분히 선언적인 한 마디.
이 쓸쓸하고 아련한 한 마디는
그 글을 읽던 어떤 소설가의 눈가에
이슬을 맺히게 했고,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긴 그 소설가는
이를 어느 독서회 게시판에 올려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50대의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켜
하나 둘 글과 꼬리들이 보태져
마침내 한 권의 책을 탄생시키게 된다.
“행복한 50대를 보내기 위한 50개의 헌장”
반백 년을 살아 온 평범한 사람들이
가슴에 쌓아둔 응어리를 글로 풀어냈다.
당시 4학년 8반이었던 나는,
코 앞에 닥친 지천명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이 책의 서평에서부터 이내 흥분하게 되었고,
50대에 새로 인생을 조명해보는 시각들이
어쩌면 이리도 경쾌하고 따뜻할 수 있는지
한 줄 한 줄 읽을 수록 머릿속이
하얗게 맑아져 오는
눈부신 느낌을 받게 되었다.
50개의 그 선언문들 모두가 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이지만
유독 눈길을 잡은 것은,
- "싫다", "안해"라는 표현에 익숙해지자.
- 나이를 벼슬이나 무기로 삼지 않는다.
- 이제는 평수를 더 늘릴 때가 아니다.
- 설익은 사람들과 논쟁에 휩쓸리지 않는다.
- 통기타를 배워 '해뜨는 집'을 연주하자.
- 박수칠 때 떠나라.
- 인생이 '50헌장'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한다.
등등 이었고,
- 질투는 여전히 50의 힘이다.
- 섹스에 더욱 전념하자.
- 이 세상에 우정은 없다.
같은 알쏭달쏭한 제목의 글도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이제까지의 삶을 숨가쁘게 달려 온
이들의 한결같은 믿음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따라서 남은 세월을 삶에 대한 기쁨과 경탄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책을 덮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나도 이제 근사한 불량 50대를 준비해야겠다" 였다.
"효도해야 할 마지막 세대이자
효도받지 못할 첫 세대라고 하는 우리,
가족사랑을 최우선 과제로
신봉하며 살아온 지난 날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제 내가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더이상 이리저리 잔머리 굴리지 않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막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봤자 한 두 잔이면 족하겠지만,
얼굴이 벌개지고 심장이 쿵쾅거리도록
술에 흠뻑 취하는 일이 잦아졌으면 좋겠다.
이제 더 이상
삼등열차를 타지 않으리라.
이제 더이상
불량감자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
이 책을 통해 결심하게 된
2005년의 내 50대 준비 선언문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
그로부터 12년의 세월이 흐르고
어김없이 또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 날,
올해 1월1일은
환갑이라고 부르는
음력으로 맞는 60번째 생일,
조금은 특별한 생일이었다.
우여곡절 삼십대를 넘기며
제야의 종소리가 울고
내 나이 마흔이 되던 그 날,
아무 것도 모르는
초등생 아들을 불러 놓고
"아빠가 이제 마흔이다,
너도 이제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된다"
훈시를 했더라는 이야기는
매년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전설처럼 회자되는
우리 가족사 유명한 일화가 됐다.
이십년 세월이 흘러
그 아들은 곧 아빠가 될 꿈에 부풀어 있고
나는 지천명을 넘어 이순에 이르렀으나,
철들자 환갑이라더니
아직도 세상사 순리를
듣지도 알지도 못하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어찌 아직도 그리 정신을 못차리고 있냐?
제발 철 좀 들어라"
호되게 야단을 맞아야 할 일이다.
자식이 커가는 만큼
나는 작아진다며
바람처럼 깃털처럼
가벼이 떠나셨던 아버지.
아들이 장성해서
착하고 예쁜 색시 얻어 독립하고
막내까지 제 앞가림 다 할만큼
훌륭하게 자랐는데,
나는 작아지기는 커녕
만삭의 배에다가
볼태기에 살만 점점 더 붙어가니,
자식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버지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나는 정말
많이 부족한 아비임이 틀림없다.
가족의 행복을
지켜야 할 최상의 가치로 살아왔으나,
돌아보니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미진함과 부족함이 참 많았다.
오랜 시간을
참아주고 힘 되어준 아내와
반듯하고 씩씩하게 성장해 준 아들 딸,
그리고 우리집 새식구가 된
착하고 예쁜 며느리,
모두에게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마침 새해를 맞는 기쁨위에
가득하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등열차를 버리고
불량감자가 되고 싶었던
나의 50대는,
뭐 하나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댕 댕 댕 종소리 몇 번으로
물 건너 가버렸다.
이제부터 가야 할
60은 어떤 나이일까?
앉아서 양말 신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옛날 할배들 아침마다
왜 그리 헛기침들 하셨는지,
식당에 걸린 구두 주걱이
왜 그리 길어야 하는지
조금씩 이해되는,
털어도 털어도 이따끔
누수사고로 바지 앞섶 더럽히는,
그런 나이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훌쩍 넘어가서 신경도 안썼던 벙커에
언젠가부터 드라이버 쳤다 하면
꼭 빠져서 걱정했었는데,
이제 아예 근처에도 못미쳐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게 됐다.ㅠㅠ
첨에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함께 엎치락 뒤치락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칼잽이들의
공통된 푸념이라 이제 마음이 편안하다.^^
근력도 순발력도 떨어져
정신적 신체적 쇠퇴기에 접어드는
육십대를 맞는 기분은
오십을 준비하던 그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비장하다.
같이 놀던 친구들
손주 수발하느라 바쁜건지
하나 둘 뜸해져 가고,
이제 같이 놀기에서 혼자 놀기로
종목을 바꿔야 하나..
운동이든, 공부든, 놀이든,
가슴에 아직 열정은 남았는데
장렬하게 불태워볼까 하다가도
혹시 남의 눈에 노욕으로 비춰질까
점점 조심스러워지고,
노병의 일상처럼
어제와 똑같은 오늘에
과연 얼마나 어떻게
편안하게 적응해 갈까..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 있지만
어디 삶이 무슨 수학 공식처럼
더하고 빼고 뭘로 나누고,
몇 살엔 뭐하고 이거는 안되고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게 있던가?
그저 묵묵히 당당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땡기는 대로 먹으면 될 일이다.
어느 할배가 신년 결기로
'하면 된다'고 벽에 써 붙였더니,
이를 본 할매가 그 옆에다
'되면 한다'고 했다지?!
그래, 요즘은 '노발대발'이란
건배사도 있던데 되면 되는 대로
신나게 씐나게 살고 볼일이다.
꿈이 남았는가?
열정이 남았는가?
힘도 남았는가?
그렇다면
자, 떠나보자.
삼등 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바다 저 시퍼런 파도를 넘어
꿈속의 고래 한마리를 찾아서..
2018. 1. 1. 최준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