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 송창환 
| 제목 | 이것도 한번 읽어 보시면(퍼온 글입니다. 그러나 그림이 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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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송창환(47) [ chsong04270@hanmail.net ] |
| 작성일 | 2002-12-24 |
이것도 한번 읽어보면 괜찮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림이 없어서...)
연정과 사랑
- 이두원 (경주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다른 민족이나 문화로부터 한국인의 민족정서를 구별지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정(情)'과 '한(恨)'을 자주 거론한다. 옛부터 우리는 정이 너무 많아 '다정(多情)'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정을 다 베풀지 못할 때 그것이 병이 되어 가슴속에 남는 것이 한이다. 정이 워낙 많은 우리민족은 그러한 정을 다 승화시키지 못할 때 남는 한조차도 즐길 수 있는 정서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인들은 비극과 눈물을 사랑하고 우울함(melancholy)을 즐긴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한맺힌 눈물 그것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못 다한 정으로 인한 그리움과 원망을 씻어내 주는 카타르시스의 절정인지도 모른다. 앞장 말미에서 소개한대로, 이 장에서는 정과 한을 바탕으로 한 한국 문화 속에서 남녀간의 연정과 사랑이 어떻게 싹트고 발전해 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랑의 의미
한국적 인간관계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정이다. 이것은 남녀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녀 사이의 관계를 정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사랑으로 묘사하는가? 적어도 오늘날에 있어서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를 "정준 사이"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언어습관이 아닌가? 앞장의 필자가 주장하는 대로 정이란 정서와 사랑이란 정서가 서로 다른 것이라면 오늘날의 남녀는 지난날의 남녀와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서로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사랑이란 말이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해일 뿐이다.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여러 가지 다른 상황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특별한 감정상태 또는 정서를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상대방을 원하거나 갈구하고, 상대방을 아끼며, 상대방과 같이 있음으로 해서 행복을 느끼는 감정상태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Kelley, 1983).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정신적 유대감인 정과 구분된다. 앞장의 필자가 정과 구분한 사랑도 바로 이러한 정서로서의 사랑인 것이다.
둘째, 사랑은 남녀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거쳐가는 단계 중의 하나, 즉 서로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이 무르익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하여 쓰이는 경우가 있다. 남녀는 처음에 만나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점점 접촉을 늘려가면서 상대의 매력에 이끌려 연정을 느끼게 되고, 이 연정이 발전하여 서로에게 깊이 몰입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란 이처럼 서로에게 깊이 몰입한 상태, 즉 남녀관계가 가장 무르익은 상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남녀관계의 한 단면을 가르키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이 가득하다" 또는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표현 속에 사용된 사랑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아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용되는 사랑은 정과 거의 같은 속성, 즉 따스함과 은근함 그리고 비타산적인 측면 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은 흔히 정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된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주어진 관계의 역사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이다" 또는 "사랑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라는 표현들에서 사용된 사랑이라는 말은 한 순간의 감정이나 주어진 관계의 한 단면이나 시점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한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가지는 전체과정을 통칭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바꾸어 말하면, 어느 한 사람과 희노애락의 역사를 같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이란 정이 생겨나고 깊어지며 스러지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이 그의 시 <초혼>에서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사랑하던 그 사람이어"하면서 목메어 불렀던 그 사람도 바로 자신과 정의 역사를 같이 했던 사람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아주 폭넓게 사용한다. 어떤 남녀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것이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절정에 이르러 있다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따스한 정이 오가고 있으며 서로가 정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만큼 이 장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로 쓰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이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의미 중 어느 하나만을 지칭하는 경우에는 그 의미를 명확히 해둠으로써 독자들이 혼란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2. 정의 역사로서의 사랑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남녀간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은 감미로움과 애틋함, 고독, 이별과 아픔, 그리움과 사모를 동반한다. 성경에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감싸주고, 시기하지 않으며, 온유하며, 영원하다고 쓰여져있다. 이러한 사랑에는 말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의 사랑은 그렇지 못하다. 사랑에는 성급함이 있고, 질투가 있고,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고, 오해가 있고, 헤어짐과 아픔이 있다.
그래도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하나의 단순한 감정상태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정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 속에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녀 사이에 사랑이 움트고, 깊어가고, 또 헤어지고 서로를 못 잊어 그리워하고 원망도 하게 되는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1) 사랑의 변천과정
남녀 사이의 사랑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변천해 간다. 두 남녀가 서로 만나서 정이 싹트게 되고 은밀히 좋아하다가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 받을 정도로 '사랑'이란 감정상태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감정은 영원토록 지속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고 두 사람이 서로 이별을 고하게 되는 수도 있다. 서로에게 정이 떨어져 이별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피치못할 사정으로 이별을 하는 경우에는 이별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이 원망으로 변해가기도 한다.
이러한 사랑의 변천 과정을 단계적으로 표현한다면 만남 --> 연정 --> 은애(隱愛) --> 사랑 --> 이별 -->그리움 --> 원망의 순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남녀가 처음 만나서(만남), 서로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연정), 속으로 은밀히 좋아하다가(은애), 급기야 사랑의 늪에 빠지게 되고(사랑), 다시 "운명의 장난"으로 헤어지게 되며(이별), 그후 서로를 못 잊어 하고(그리움), 자신을 떠나간 상대를 야속하게 생각한다(원망)는 것이 사랑의 시나리오이다.
2) 시간의 공간 속에서 연출되는 사랑의 역사
그러면 이러한 사랑의 발전단계를 시간의 흐름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림 2-1>에서 모든 바와 같이, 사랑은 그 과정(즉 발전단계)을 가로축으로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세로축으로 하는 시간적 공간위에 배열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랑의 변천과정 중 첫단계인 만남은 시간적으로 볼 때 가장 첫 단계인 <시간1>에서 시작되며, 둘째 단계인 연정은 <시간1>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라는 과정을 거쳐 <시간2>에서 나타나며, 셋째 단계인 은애는 <시간1>에서 이루어진 만남과 <시간2>에서 나타난 연정을 거쳐 <시간3>에서 생겨나고, 이러한 과정은 계속되어, 마지막 단계인 원망은 <시간1>에서 이루어진 만남, <시간2>에서 나타난 연정, <시간3>에서 발생한 은애, <시간4>에서 생겨난 사랑, <시간5>에서 발생한 이별, <시간6>에서 생겨난 그리움이란 과정을 거쳐서 <시간7>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림 2-1>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는 사랑의 과정
사랑의 과정
단계1 단계2 단계3 단계4 단계5 단계6 단계7
시간7 원망
+
시간6 그리움 그리움
+ +
시간5 이별 이별 이별
+ + +
시간4 사랑 사랑 사랑 사랑
+ + + +
시간3 은애 은애 은애 은애 은애
+ + + + +
시간2 연정 연정 연정 연정 연정 연정
+ + + + + +
시간1 만남 만남 만남 만남 만남 만남 만남
<그림 2-1>은 사랑을 하나의 단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면적으로 사랑을 본다는 것은 사랑의 현재 단계를 그 역사는 무시한채 현시점에서 나타나는 현상만을 중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의 과정 중 <단계4>를 <시간4>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현상, 즉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해 있는 상태로만 이해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녀관계에 있어서의 <단계4>인 사랑이라는 것은 <시간4>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상태 이외에도 이 두 남녀가 함께 해온 <시간1>, <시간2>, 그리고 <시간3>에서의 만남과 연정 그리고 은애의 역사를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사랑의 단계는 현시점에서 보여주는 단면 뿐만 아니라 그 단면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그전 단계들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랑을 역사로 인식하는 것은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인 <단계7>에서 생겨나는 원망의 감정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즉, 두 남녀가 이별을 한 후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자신을 떠난 상대를 원망하며 눈물짓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단면적으로 볼 때 우리는 "그들은 원망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서로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타난 원망은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과정의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남녀가 흘리고 있는 눈물은 단순한 '원망의 눈물'이 아니라 '그리움의 눈물'이요, '이별의 눈물'이며, '사랑의 눈물'이고, '은애의 눈물'이며 '연정의 눈물'이고 또 '만남의 눈물'이기도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를 떠난 당신을 원망하오"라는 단편적인 말은 "그래도 당신을 못 잊어 그리워 합니다"라는 말이고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3) 정은 사랑보다 무섭다
모든 커뮤니케이션 행위가 그러하듯이 남녀 사이의 사랑이란 이처럼 단면적인 측면과 역사적인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은 단면적이거나 단편적인 현실 상황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은 통합적이거나 역사적인 측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인의 정서는 '결과론'보다는 '과정론'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랑보다 정이 무섭다"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상태 또는 발전단계의 한 단면으로서의 사랑, 즉 결과적 차원을 나타내는 것이며, 정이라는 것은 접촉의 역사, 즉 과정적 차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정상태 또는 단면으로서의 사랑은 아무리 뜨거워도 식을 수 있고 '미움'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과정과 역사를 가진 정은 쉽게 바뀔 수 없다. 설사 서로가 헤어져 상대를 원망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원망'의 시점까지 있었던 '만남,' '연정,' '은애,' '사랑,' '이별,' 그리고 '그리움'의 세월 속에서 깊어진 정은 그들의 가슴 속에 오래토록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랑은 흘러가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갈 수 있다. 그러나 정은 그 사람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 괴로움이 되고, 고통이 되고, 그래도 못다 푼 정은 결국 한(恨)으로 남는 것 아닐까? 그래서 사랑보다 무서운 것이 정일 것이다.
3. 한국인의 연정과 사랑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더비토(DeVito, 1988)는 인간관계의 발전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번째 단계는 '접촉(Contact)'이다. 이단계에서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자기소개를 한다든지 서로 눈이 마주치고 미소를 주고받는다든지 하는, 서로의 얼굴을 익히는 과정을 포함한다. 만일 두 사람이 관계를 지속시키고자 할 때는 두번째 단계인 '연루(Involvement)'에 접어들게 된다. 연루란 한편으로는 상대를 좀 더 알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상대에게 좀 더 깊이 보여주는 과정을 포함한다. 남녀 사이의 관계라면 이 단계는 서로에게 관심이 있어 몇 차례에 걸쳐 다시 만나고 데이트를 하는 단계가 될 것이다. 세번째 단계는 '친근(Intimacy)' 단계인데 여기서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지고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많은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내 애인," "내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표현이 친근단계에서의 대인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깊은 비밀이나 소중한 추억들을 상대에게 고백하기도 한다.
다음 두 단계는 지금까지의 진행과정과 반대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대표하는 '붕괴(Deterioration)'단계이다. 여기서 두 사람은 상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신에게 친근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자신이 생각해 왔던 것 만큼 자신이 상대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거나 만남이 이루어져도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 또 상대를 부르는 호칭도 어색해지고 자신이 하는 말 하나 하나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단계는 '이별(Dissoution)'이다. 이 단계에서는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속시켜 왔던 관계의 끈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별을 고한 후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전-(ex-)'이라는 접두어가 붙게 된다. 이를테면, 전처(exwife), 전남편(exhusband), 전애인(exgirlfriend/exboyfriend)등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단계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헤어짐으로 인한 괴로움과 고통의 시간이 될 수도 있으며, 상대가 차지해 왔던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다른 상대를 물색하는 단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서로 연루되었다가 점점 더 친근해지고, 그러다가 서로로부터 멀어지고 결국에는 이별에까지 이르게되는 인간관계는 동서양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의 진행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의식이나 행동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나 정서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문화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 문화적 이상(Ideology)일 수 있는 반면 다른 문화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임을 보낸다"는 것이 문화적 이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상대에 대한 감정의 표현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싫어하면 "싫어한다"고 말하는 직설적 표현문화가 있는가 하면, 사랑해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미워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문화적 정서가 있다.
문화에 따라 의식과 행동 또는 표현양식이 달라지는 이유는 사람이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해온 사회의 문화속에서 길들여지고, 자신의 감정이나 의미 또는 경험을 정리하거나 표현하는 양식도 그 사회의 문화가 허용하고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 제한되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특유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독특한 정서와 표현방식을 체득해 왔다. 이러한 우리의 정서와 그 정서의 표현방식은 인간관계의 각 발전단계에서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한국 남녀 사이의 인간관계가 만남에서부터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발전하고 그 속에서 우리 고유의 민족정서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만남의 인연: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
한국인은 만남을 무척 소중히 생각한다. 불교적 문화정서가 보편화된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인에게 만남이란 본래 우연의 결과가 아니요 인연(karma)의 산물인 것이다. 남녀간의 만남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오다 가다" 만난 우연한 조우라 할지라도 그 만남은 하나의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연인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따른다면 그 우연한 만남은 무궁무진한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기호(sign)'일 수도 있다. 사연 많은 전생으로부터의 종점(終點)일 수도 있고 사연 많은 미래 세계를 향한 업보의 출발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서 김억의 <오다가다>라는 시에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그저 보고 그대로 예고 말건가"라는 귀절과 "자다 깨다/꿈에서 만난 이라고/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라는 귀절이 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는 오다 가다 만난 사람이라고 해서 그대로 보고 그냥 가버리고 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다 가다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인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남녀의 만남은 그들 사이에 움트는 연정과 사랑의 시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만남에 추상적이나마 어떤 숙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 틀 안에서 안주하고 싶어한다. 설사 그것이 악연이 되어 훗날 서로를 원망하게 된다 할지라도 인연에 의한 숙명적 만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맞아야할 매이기 때문에, 만남을 인연으로 보는 것은 불행에 대한 역설적 위안이요 심리적 카타르시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이 사랑으로 꽃피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만남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의 문화적 정서는 그 만남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회적 가치관을 남녀 모두에게 심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연인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는 인간관계를 시작부터 강하게 묶어주는 끈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관이 묶어주고 있는 관계는 쉽게 끊어질 수 없을 뿐더러 차후 접촉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마찰을 줄여주는 윤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연인이 어떤 불친절한 행동을 하였을 때 그것을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헤어져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인연이 있어서 그 사람과 만났는데..." 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마음이 바로 한국 문화가 남녀의 만남에 제공하는 끈인 것이다.
2) 연정과 은애(隱愛)의 마음: "웃은 죄"
한국의 전통적 문화속에서 남녀의 사랑은 동(動)적인 색채보다는 정(靜)적인 색채가 더욱 강하다. 남녀의 첫만남에서 연인관계로 발전해 가는 과정은 더욱 그렇다. 그것은 상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기 때문일 수 도 있다. 자신에 대한 상대의 연정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상대에게 열어 보였다가 체면을 손상 당할 수도 있고 또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은 자기보호 심리도 잠재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우리사회가 남녀간의 활발한 접촉과 의사표현을 장려해주기보다는 절제와 제한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이란 말이 그러한 문화적 정서를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내심으로야 임을 향한 정열이 뜨겁고, 다시 만날 날에 대한 조바심에 잠 못 이룰지라도 그러한 정열과 조바심을 밖으로 나타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연정을 품고 있는 데 대한 '부끄러운 마음', '흠모의 애틋함', '은밀히 사랑하는 수줍음'이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결과적으로 남녀 간에 만남이 이루어지고 연정이 싹트는 과정에서도 연정의 표시는 직접적 표현보다는 간접적이거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상대방은 표면에 나타난 것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심층적 의미를 해독함으로써 상대방의 연정을 읽어내야 했다.
파인(巴人) 김동환은 이러한 남녀 간의 연정과 은애의 사실에 대한 수줍은 부인(否認)을 <웃은 죄>라는 시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平壤城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罪 밖에.
길가던 나그네가 다가와 묻는 말에 "나"는 대답을 했을 뿐이고 또 그가 물을 달라기에 물 한바가지 떠주었을 뿐이며 고맙다고 하기에 괜찮다고 대답했을 뿐이지 "나"는 그 사람에게 절대로 관심도 없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 관심, 그리고 연정이 겉으로 강조된, 자신의 수동적 입장 속에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수동적인 "나"에게도 "웃은 죄"가 있다는 것은 시인되었다. 미소와 함께 가르쳐준 지름길, 미소와 함께 떠 준 물 한 바가지, 미소와 함께 잘 가시라고 한 인사말, 그 미소 속에서 표면적으로 강조되었던 의미는 완전히 역전되는 것이다. "어디에 가시는 길 입니까?" "물 한잔 드릴까요?" "조심해 가세요." 이러한 것들이 바로 "내"가 알고 싶었고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웃은 죄"는 이처럼 수동적 표면 뒤에 숨어있는 능동적 심중, 즉 그 나그네를 내심 좋아하는 은애의 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 입가에 머문 "웃음"은 정(靜)적인 사랑의 절정인 것이다.
3) 한국인의 역설적 사랑: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
사랑이란 참으로 묘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랑 앞에서는 상대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상대의 결점이나 능력의 부족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게 된다"는 말도 있다. 자신의 연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의 상태가 곧 사랑일 것이다.
미국 학자 래니건(Lanigan, 1988)은 인간의 의식이란 자아(自我; Self)라는 그릇과 타아(他我; Other)라는 그릇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자아란 '나'라는 개념의 원천이 되고 타아란 '너'라는 개념의 원천이 된다. 이렇게 의식세계에서 공존하고 있는 '나'는 항상 빈자리로 남은 '너'란 그릇을 채워줄 수 있는 타인을 갈망하게 된다. 그것은 '나'와 '너'란 두개의 그릇이 시이소오의 양끝에 놓여야만 심리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상대자인 '너'가 부재하는 '나' 혼자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며 그래서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롭고 쓸쓸해지는 것이다. 사랑이란 '너'라는 그 빈 그릇을 채워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하고 안정된 사람이 나타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서양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이처럼 '나'를 완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서양적 사랑이란 다분히 자기 중심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나'보다는 '너'를 더 중시하는 희생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을 더 강조하는 사랑을 지고한 사랑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이란 감정상태에 빠진 연인들의 시간은 달콤하고 행복에 겨운 순간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이 많은 한국인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을 당연시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내몸 안에 있어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정의 위력일 것이다. 사랑으로 인한 희생은 표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괴로움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고통과 괴로움이기에 역설적으로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한국인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를 매우 소극적이고 감상적으로 만든다. 한국인은 "내가 사랑한 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든지 "내가 싫어 떠난 당신에게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식의 이성적 또는 합리적인 사랑 대신 "사랑하기에 당신을 보낸다"든지 "보내고 그리워한다"는 식의 감상적이고 역설적인 사랑에 더 익숙하다는 것이다.
소극적이고 감상적인 한국인의 사랑방식은 사랑의 표현마저도 매우 역설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행여 임에게 부담이 될까봐 마음의 아픔을 억제하면서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임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임을 번민케 할 수는 없다는 식의 희생정신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한국인의 역설적 사랑은 김용호 시인의 <역설>이라는 시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極과 極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 그렇게도 가까왔다.
언어의 패러독스를
하나의 진리로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불행으로 생각치 않는다.
회오리 바람이 뜨거운 정열을 몰아
그를 껴안을 기회를 갖다 주었어도
이성의 차디찬 단념의 칼날은
끝내 그이의 행복을 뺏지 않았다.
그이의 행복이란
모든 것에 가난한
내 앞을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최후의 이 자리에서
뒤끓는 심장의 고동을 땅위에 꽂았다.
새파랗게 질린 내 입술은
잠자리 날개처럼 떨렸으나
다음의 말은 뼈아프게 똑똑하였다.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는 역설적 사랑의 절정이다. 역설이란 '표현'과 그 '의미'가 상반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즉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라는 표현은 "뼈에 사무치도록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성의 차디찬 단념의 칼날은 끝내 그이의 행복을 뺏지 않은" 내적이고 정적인, 그러나 눈물겹게 진실된 사랑인 것이다. 자신의 연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가난한 자신이 "사랑"이란 명목으로 사랑하는 연인의 행복을 빼앗을 수 없다는 정서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이 사람에게 "극과 극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 그렇게도 가까운" 것이었다. 한쪽의 "극"이 '나'이며 다른 한쪽의 "극"은 '당신'이라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가난한 '나'는 '당신'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을 떠나보낼 수 있는 '나'는 '당신'과 너무나 가까운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4) 한국인의 이별 방식: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 "최초의 님"에서 "만나지 않는 것도 님이 아니오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라고 쓰고 있다. 사랑이 영원하다고는 하나 사랑도 하나의 인간사이고, 인간만사에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고 정들고 또 헤어지는 것이 어디 한 두 사람과의 일뿐이겠는가 마는 정들고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은 고통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정든 세월이 길수록 그리고 그 사랑이 깊을수록 연인과의 이별은 혼자 남는 이들에게 더 큰 외로움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 사랑하던 임과 이별한 사람에게는 사랑이란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눈물의 씨앗"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이별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면 더욱 섭섭하고 고통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민요 <아리랑>에서 "나를 버리고 가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고 노래하는 사람의 심중은 헤아리고도 남을 만하다.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러나 붙잡으면 나를 더 싫어할 것 같은 임, 그래도 언젠가 임이 다시 돌아와주기를 바라는 그 애절한 심정이 <가시리>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ꟁ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너 살라폁고
ꟁ리고 가시리잇고
잡꿁와 두어리 마鏁鏅
선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님 보내럓노니
가시鏅韕 도셔 오쇼서
믿어지지 않는 임과의 이별에 "가셔야만 합니까, 정말 나를 버리고 가셔야만 합니까"라는 원망 섞인 물음의 형식으로 된 이 노래의 첫번째 연에는 그 동안 정과 사랑을 생각해서라도 어찌 날 버리고 임이 떠날 수 있겠는가 하는 애틋한 호소가 담겨 있다. 두번째 연에서도 임이 떠난 후 주체할 수 없을 자신의 심정을 예견이라도 하듯 "당신 없는 세상을 나 혼자 어찌 살라고 나를 버리고 가십니까"하고 탄식하고 있다. 세번째 연은 속마음의 폭로이다. 떠나가는 가는 임을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기 짝이 없지만 혹시나 내가 잡음으로 해서 임이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네번째 연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독특한 한국적 정서를 보게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임을 보내기는 하지만 지금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시는 것처럼 다시 돌아와 달라는 말이다.
결국 이별을 이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 임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주리라는 기다림의 마음이 섬세한 언어로 조각된 노래이다. 김상선(1980)은 이러한 한국인의 사랑과 이별을 서양과 비교하여 "서양사람들의 사랑은 적극적이요 행동적으로 나타나는데, 우리의 옛 조상들의 사랑은 보다 소극적이요 정신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한국의 소극적이며 정신적인 사랑이 맞이하는 이별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나를 보기 싫어 떠나는 임이라면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고자 하여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깊은 정으로 맺어진 사랑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시의 주인공은 떠나가는 임과 이별에 직면해서도 차갑다고 할만큼 이성을 잃지 않고 있다. 냉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이 역겨워 떠나는 임의 앞 길에 진달래 꽃을 뿌려 놓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이성과 냉정의 이면에는 뜨거운 눈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것은 실제 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슬픔에 잠겨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가시리>와 <진달래>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한국인의 이별에 대한 정서는 떠나는 임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순수함과, 어차피 돌려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울며불며 매달리지 않겠다는 절제와, 깨끗하게 보냄으로써 정의 역사와 그에 대한 추억을 아름답게 만들어 임의 마음을 돌이켜 보겠다는 희망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이별을 그 관계의 종말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별 후에도 자신의 임을 향한 정은 지속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관계는 계속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그 정을 받아 줄 임이 가까이 있지 않다는 사실뿐인 것이다. 그래서 서운한 임을 전도에 꽃을 뿌려주면서까지 고이 보내드릴 수 있는 것이다.
5) 그리움과 한의 세월: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임은 쉽게 떠나도 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하던 임이 떠난 후에도 "혹시나"하는 기다림은 계속되며 이 기다림은 그리움을 낳는다. 그리고 이 기다림의 세월 동안 그리움은 점차 원망으로 바뀌게 되고, 이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그리움과 원망은 결국 한이란 정서를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으로 인하여 맺힌 한이란 "셜온님 보내럓노니 가시鏅韕 도셔 오쇼서"라고 애원하는 심정, 그리고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언약도 없이 그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마음 속에서 맺혀진 외로움과 고통의 이슬과 같은 것일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고 다짐하고 맹서했지만 어찌할 수 없이 떠난 임을 그리워하고 원망하다 결국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오는 것이 정한(情恨)의 눈물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민요 <강원도 아리랑>과 <정선 아리랑>을 중간에서 따 만든 <한오백년>의 가사를 보면 이러한 한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이창배, 1976).
후렴: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한 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백사장 세(細)모레밭에 칠성단을 ꆽ고 임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청춘에 짓밟힌 애끊는 사랑,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리.
한(恨)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 살겠네.
꽃답던 내 청춘 절로 늙어 남은 반생을 어느 곳에다 뜻 붙일꼬.
살살바람에 달빛은 밝아도 그리는 마음은 어제가 오늘.
나리는 눈이 산천을 뒤덮듯 정든 임 사랑으로 이 몸을 덮으소.
지척에 둔 임을 그려 살지 말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잊어나 볼까.
으스름 달밤에 홀로 일어 안 오는 임 기다리다 새벽달이 지샜네.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런가, 왜 이다지도 앞날이 암담한가.
....중략(中略)....
첫째 연,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情)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에서 우리는 한국적 연정의 절정을 볼 수 있다.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버렸을 때 당분간 실의에 빠졌다가도 그것을 결과로 받아들이고 다른 연인을 찾아보려는 것이 서양문화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라면 정의 문화 속에서 과정을 중시하는 한국인은 이별을 결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그리움의 눈물로 세월을 지새게 된다. 임이 떠난 것은 하나의 단면적인 사건이고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일 뿐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까지 쌓아온 정인 것이다. 정은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에게 연정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기까지 함께 해온 희노애락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인 만큼 임과 이별하였다고 해서 당장 없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통하여 쌓아온 정은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현실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듯하다. 바꾸어 말하면 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성적이며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의 속성이 바로 "지척에 둔 임을 그려 살지 말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잊어나 볼까"하는 마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떠난 임을 오랫동안, 길게는 평생동안 그리워하고 못 잊어 하는 것이 한국적 사랑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움은 한이라는 또 다른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루지 못한 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한은 제4장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이기 때문에 이 장에서의 논의는 이쯤서 접어둘까 한다.
참 고 문 헌
김 삼룡 (1994). 동방의 등불 한국. 서울: 행림출판
김 상선 (1980). 詩와 人生의 對話. 서울: 일신사.
이 창배 (1976). 한국 가창 대집. 서울: 홍인 출판사.
Alexander, H. (1988). The language and logic of philosophy. New York: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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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ito, J. (1988). Human communication. New York, Cambridge, Washington: Har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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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obson, R. (1971). Selected writings, Vol.II: Word and language. The Hague: Mouton.
Kelly, H.H.(1983). "Love and commitment." In H.H. Kelley et al. (Eds.), Close
Relationships. New York: W.H. Freeman and Company.
Lanigan, R. (1988). The phenomenology of communication. Pittsburgh: Duques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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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gden, C.K., & Richards, I.A. (1946). The meaning of meaning. New York: Harco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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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esch, J. & Bateson, G. (1987). Communication: The social matrix of psychiatry. New
York: W.W. Norton & Company.
Wilden, A. (1987). The rules are no game.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연정과 사랑
- 이두원 (경주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다른 민족이나 문화로부터 한국인의 민족정서를 구별지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정(情)'과 '한(恨)'을 자주 거론한다. 옛부터 우리는 정이 너무 많아 '다정(多情)'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정을 다 베풀지 못할 때 그것이 병이 되어 가슴속에 남는 것이 한이다. 정이 워낙 많은 우리민족은 그러한 정을 다 승화시키지 못할 때 남는 한조차도 즐길 수 있는 정서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인들은 비극과 눈물을 사랑하고 우울함(melancholy)을 즐긴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한맺힌 눈물 그것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못 다한 정으로 인한 그리움과 원망을 씻어내 주는 카타르시스의 절정인지도 모른다. 앞장 말미에서 소개한대로, 이 장에서는 정과 한을 바탕으로 한 한국 문화 속에서 남녀간의 연정과 사랑이 어떻게 싹트고 발전해 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랑의 의미
한국적 인간관계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정이다. 이것은 남녀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녀 사이의 관계를 정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사랑으로 묘사하는가? 적어도 오늘날에 있어서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를 "정준 사이"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언어습관이 아닌가? 앞장의 필자가 주장하는 대로 정이란 정서와 사랑이란 정서가 서로 다른 것이라면 오늘날의 남녀는 지난날의 남녀와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서로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사랑이란 말이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해일 뿐이다.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여러 가지 다른 상황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특별한 감정상태 또는 정서를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상대방을 원하거나 갈구하고, 상대방을 아끼며, 상대방과 같이 있음으로 해서 행복을 느끼는 감정상태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Kelley, 1983).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정신적 유대감인 정과 구분된다. 앞장의 필자가 정과 구분한 사랑도 바로 이러한 정서로서의 사랑인 것이다.
둘째, 사랑은 남녀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거쳐가는 단계 중의 하나, 즉 서로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이 무르익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하여 쓰이는 경우가 있다. 남녀는 처음에 만나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점점 접촉을 늘려가면서 상대의 매력에 이끌려 연정을 느끼게 되고, 이 연정이 발전하여 서로에게 깊이 몰입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란 이처럼 서로에게 깊이 몰입한 상태, 즉 남녀관계가 가장 무르익은 상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남녀관계의 한 단면을 가르키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이 가득하다" 또는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표현 속에 사용된 사랑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아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용되는 사랑은 정과 거의 같은 속성, 즉 따스함과 은근함 그리고 비타산적인 측면 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은 흔히 정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된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주어진 관계의 역사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이다" 또는 "사랑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라는 표현들에서 사용된 사랑이라는 말은 한 순간의 감정이나 주어진 관계의 한 단면이나 시점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한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가지는 전체과정을 통칭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바꾸어 말하면, 어느 한 사람과 희노애락의 역사를 같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이란 정이 생겨나고 깊어지며 스러지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이 그의 시 <초혼>에서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사랑하던 그 사람이어"하면서 목메어 불렀던 그 사람도 바로 자신과 정의 역사를 같이 했던 사람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아주 폭넓게 사용한다. 어떤 남녀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것이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절정에 이르러 있다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따스한 정이 오가고 있으며 서로가 정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만큼 이 장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로 쓰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이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의미 중 어느 하나만을 지칭하는 경우에는 그 의미를 명확히 해둠으로써 독자들이 혼란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2. 정의 역사로서의 사랑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남녀간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은 감미로움과 애틋함, 고독, 이별과 아픔, 그리움과 사모를 동반한다. 성경에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감싸주고, 시기하지 않으며, 온유하며, 영원하다고 쓰여져있다. 이러한 사랑에는 말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의 사랑은 그렇지 못하다. 사랑에는 성급함이 있고, 질투가 있고,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고, 오해가 있고, 헤어짐과 아픔이 있다.
그래도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하나의 단순한 감정상태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정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 속에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녀 사이에 사랑이 움트고, 깊어가고, 또 헤어지고 서로를 못 잊어 그리워하고 원망도 하게 되는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1) 사랑의 변천과정
남녀 사이의 사랑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변천해 간다. 두 남녀가 서로 만나서 정이 싹트게 되고 은밀히 좋아하다가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 받을 정도로 '사랑'이란 감정상태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감정은 영원토록 지속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고 두 사람이 서로 이별을 고하게 되는 수도 있다. 서로에게 정이 떨어져 이별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피치못할 사정으로 이별을 하는 경우에는 이별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이 원망으로 변해가기도 한다.
이러한 사랑의 변천 과정을 단계적으로 표현한다면 만남 --> 연정 --> 은애(隱愛) --> 사랑 --> 이별 -->그리움 --> 원망의 순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남녀가 처음 만나서(만남), 서로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연정), 속으로 은밀히 좋아하다가(은애), 급기야 사랑의 늪에 빠지게 되고(사랑), 다시 "운명의 장난"으로 헤어지게 되며(이별), 그후 서로를 못 잊어 하고(그리움), 자신을 떠나간 상대를 야속하게 생각한다(원망)는 것이 사랑의 시나리오이다.
2) 시간의 공간 속에서 연출되는 사랑의 역사
그러면 이러한 사랑의 발전단계를 시간의 흐름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림 2-1>에서 모든 바와 같이, 사랑은 그 과정(즉 발전단계)을 가로축으로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세로축으로 하는 시간적 공간위에 배열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랑의 변천과정 중 첫단계인 만남은 시간적으로 볼 때 가장 첫 단계인 <시간1>에서 시작되며, 둘째 단계인 연정은 <시간1>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라는 과정을 거쳐 <시간2>에서 나타나며, 셋째 단계인 은애는 <시간1>에서 이루어진 만남과 <시간2>에서 나타난 연정을 거쳐 <시간3>에서 생겨나고, 이러한 과정은 계속되어, 마지막 단계인 원망은 <시간1>에서 이루어진 만남, <시간2>에서 나타난 연정, <시간3>에서 발생한 은애, <시간4>에서 생겨난 사랑, <시간5>에서 발생한 이별, <시간6>에서 생겨난 그리움이란 과정을 거쳐서 <시간7>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림 2-1>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는 사랑의 과정
사랑의 과정
단계1 단계2 단계3 단계4 단계5 단계6 단계7
시간7 원망
+
시간6 그리움 그리움
+ +
시간5 이별 이별 이별
+ + +
시간4 사랑 사랑 사랑 사랑
+ + + +
시간3 은애 은애 은애 은애 은애
+ + + + +
시간2 연정 연정 연정 연정 연정 연정
+ + + + + +
시간1 만남 만남 만남 만남 만남 만남 만남
<그림 2-1>은 사랑을 하나의 단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면적으로 사랑을 본다는 것은 사랑의 현재 단계를 그 역사는 무시한채 현시점에서 나타나는 현상만을 중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의 과정 중 <단계4>를 <시간4>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현상, 즉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해 있는 상태로만 이해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녀관계에 있어서의 <단계4>인 사랑이라는 것은 <시간4>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상태 이외에도 이 두 남녀가 함께 해온 <시간1>, <시간2>, 그리고 <시간3>에서의 만남과 연정 그리고 은애의 역사를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사랑의 단계는 현시점에서 보여주는 단면 뿐만 아니라 그 단면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그전 단계들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랑을 역사로 인식하는 것은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인 <단계7>에서 생겨나는 원망의 감정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즉, 두 남녀가 이별을 한 후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자신을 떠난 상대를 원망하며 눈물짓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단면적으로 볼 때 우리는 "그들은 원망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서로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타난 원망은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과정의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남녀가 흘리고 있는 눈물은 단순한 '원망의 눈물'이 아니라 '그리움의 눈물'이요, '이별의 눈물'이며, '사랑의 눈물'이고, '은애의 눈물'이며 '연정의 눈물'이고 또 '만남의 눈물'이기도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를 떠난 당신을 원망하오"라는 단편적인 말은 "그래도 당신을 못 잊어 그리워 합니다"라는 말이고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3) 정은 사랑보다 무섭다
모든 커뮤니케이션 행위가 그러하듯이 남녀 사이의 사랑이란 이처럼 단면적인 측면과 역사적인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은 단면적이거나 단편적인 현실 상황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은 통합적이거나 역사적인 측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인의 정서는 '결과론'보다는 '과정론'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랑보다 정이 무섭다"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상태 또는 발전단계의 한 단면으로서의 사랑, 즉 결과적 차원을 나타내는 것이며, 정이라는 것은 접촉의 역사, 즉 과정적 차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정상태 또는 단면으로서의 사랑은 아무리 뜨거워도 식을 수 있고 '미움'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과정과 역사를 가진 정은 쉽게 바뀔 수 없다. 설사 서로가 헤어져 상대를 원망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원망'의 시점까지 있었던 '만남,' '연정,' '은애,' '사랑,' '이별,' 그리고 '그리움'의 세월 속에서 깊어진 정은 그들의 가슴 속에 오래토록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랑은 흘러가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갈 수 있다. 그러나 정은 그 사람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 괴로움이 되고, 고통이 되고, 그래도 못다 푼 정은 결국 한(恨)으로 남는 것 아닐까? 그래서 사랑보다 무서운 것이 정일 것이다.
3. 한국인의 연정과 사랑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더비토(DeVito, 1988)는 인간관계의 발전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번째 단계는 '접촉(Contact)'이다. 이단계에서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자기소개를 한다든지 서로 눈이 마주치고 미소를 주고받는다든지 하는, 서로의 얼굴을 익히는 과정을 포함한다. 만일 두 사람이 관계를 지속시키고자 할 때는 두번째 단계인 '연루(Involvement)'에 접어들게 된다. 연루란 한편으로는 상대를 좀 더 알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상대에게 좀 더 깊이 보여주는 과정을 포함한다. 남녀 사이의 관계라면 이 단계는 서로에게 관심이 있어 몇 차례에 걸쳐 다시 만나고 데이트를 하는 단계가 될 것이다. 세번째 단계는 '친근(Intimacy)' 단계인데 여기서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지고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많은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내 애인," "내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표현이 친근단계에서의 대인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깊은 비밀이나 소중한 추억들을 상대에게 고백하기도 한다.
다음 두 단계는 지금까지의 진행과정과 반대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대표하는 '붕괴(Deterioration)'단계이다. 여기서 두 사람은 상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신에게 친근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자신이 생각해 왔던 것 만큼 자신이 상대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거나 만남이 이루어져도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 또 상대를 부르는 호칭도 어색해지고 자신이 하는 말 하나 하나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단계는 '이별(Dissoution)'이다. 이 단계에서는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속시켜 왔던 관계의 끈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별을 고한 후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전-(ex-)'이라는 접두어가 붙게 된다. 이를테면, 전처(exwife), 전남편(exhusband), 전애인(exgirlfriend/exboyfriend)등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단계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헤어짐으로 인한 괴로움과 고통의 시간이 될 수도 있으며, 상대가 차지해 왔던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다른 상대를 물색하는 단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서로 연루되었다가 점점 더 친근해지고, 그러다가 서로로부터 멀어지고 결국에는 이별에까지 이르게되는 인간관계는 동서양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의 진행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의식이나 행동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나 정서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문화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 문화적 이상(Ideology)일 수 있는 반면 다른 문화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임을 보낸다"는 것이 문화적 이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상대에 대한 감정의 표현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싫어하면 "싫어한다"고 말하는 직설적 표현문화가 있는가 하면, 사랑해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미워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문화적 정서가 있다.
문화에 따라 의식과 행동 또는 표현양식이 달라지는 이유는 사람이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해온 사회의 문화속에서 길들여지고, 자신의 감정이나 의미 또는 경험을 정리하거나 표현하는 양식도 그 사회의 문화가 허용하고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 제한되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특유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독특한 정서와 표현방식을 체득해 왔다. 이러한 우리의 정서와 그 정서의 표현방식은 인간관계의 각 발전단계에서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한국 남녀 사이의 인간관계가 만남에서부터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발전하고 그 속에서 우리 고유의 민족정서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만남의 인연: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
한국인은 만남을 무척 소중히 생각한다. 불교적 문화정서가 보편화된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인에게 만남이란 본래 우연의 결과가 아니요 인연(karma)의 산물인 것이다. 남녀간의 만남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오다 가다" 만난 우연한 조우라 할지라도 그 만남은 하나의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연인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따른다면 그 우연한 만남은 무궁무진한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기호(sign)'일 수도 있다. 사연 많은 전생으로부터의 종점(終點)일 수도 있고 사연 많은 미래 세계를 향한 업보의 출발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서 김억의 <오다가다>라는 시에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그저 보고 그대로 예고 말건가"라는 귀절과 "자다 깨다/꿈에서 만난 이라고/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라는 귀절이 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는 오다 가다 만난 사람이라고 해서 그대로 보고 그냥 가버리고 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다 가다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인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남녀의 만남은 그들 사이에 움트는 연정과 사랑의 시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만남에 추상적이나마 어떤 숙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 틀 안에서 안주하고 싶어한다. 설사 그것이 악연이 되어 훗날 서로를 원망하게 된다 할지라도 인연에 의한 숙명적 만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맞아야할 매이기 때문에, 만남을 인연으로 보는 것은 불행에 대한 역설적 위안이요 심리적 카타르시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이 사랑으로 꽃피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만남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의 문화적 정서는 그 만남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회적 가치관을 남녀 모두에게 심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연인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는 인간관계를 시작부터 강하게 묶어주는 끈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관이 묶어주고 있는 관계는 쉽게 끊어질 수 없을 뿐더러 차후 접촉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마찰을 줄여주는 윤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연인이 어떤 불친절한 행동을 하였을 때 그것을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헤어져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인연이 있어서 그 사람과 만났는데..." 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마음이 바로 한국 문화가 남녀의 만남에 제공하는 끈인 것이다.
2) 연정과 은애(隱愛)의 마음: "웃은 죄"
한국의 전통적 문화속에서 남녀의 사랑은 동(動)적인 색채보다는 정(靜)적인 색채가 더욱 강하다. 남녀의 첫만남에서 연인관계로 발전해 가는 과정은 더욱 그렇다. 그것은 상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기 때문일 수 도 있다. 자신에 대한 상대의 연정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상대에게 열어 보였다가 체면을 손상 당할 수도 있고 또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은 자기보호 심리도 잠재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우리사회가 남녀간의 활발한 접촉과 의사표현을 장려해주기보다는 절제와 제한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이란 말이 그러한 문화적 정서를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내심으로야 임을 향한 정열이 뜨겁고, 다시 만날 날에 대한 조바심에 잠 못 이룰지라도 그러한 정열과 조바심을 밖으로 나타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연정을 품고 있는 데 대한 '부끄러운 마음', '흠모의 애틋함', '은밀히 사랑하는 수줍음'이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결과적으로 남녀 간에 만남이 이루어지고 연정이 싹트는 과정에서도 연정의 표시는 직접적 표현보다는 간접적이거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상대방은 표면에 나타난 것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심층적 의미를 해독함으로써 상대방의 연정을 읽어내야 했다.
파인(巴人) 김동환은 이러한 남녀 간의 연정과 은애의 사실에 대한 수줍은 부인(否認)을 <웃은 죄>라는 시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平壤城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罪 밖에.
길가던 나그네가 다가와 묻는 말에 "나"는 대답을 했을 뿐이고 또 그가 물을 달라기에 물 한바가지 떠주었을 뿐이며 고맙다고 하기에 괜찮다고 대답했을 뿐이지 "나"는 그 사람에게 절대로 관심도 없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 관심, 그리고 연정이 겉으로 강조된, 자신의 수동적 입장 속에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수동적인 "나"에게도 "웃은 죄"가 있다는 것은 시인되었다. 미소와 함께 가르쳐준 지름길, 미소와 함께 떠 준 물 한 바가지, 미소와 함께 잘 가시라고 한 인사말, 그 미소 속에서 표면적으로 강조되었던 의미는 완전히 역전되는 것이다. "어디에 가시는 길 입니까?" "물 한잔 드릴까요?" "조심해 가세요." 이러한 것들이 바로 "내"가 알고 싶었고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웃은 죄"는 이처럼 수동적 표면 뒤에 숨어있는 능동적 심중, 즉 그 나그네를 내심 좋아하는 은애의 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 입가에 머문 "웃음"은 정(靜)적인 사랑의 절정인 것이다.
3) 한국인의 역설적 사랑: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
사랑이란 참으로 묘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랑 앞에서는 상대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상대의 결점이나 능력의 부족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게 된다"는 말도 있다. 자신의 연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의 상태가 곧 사랑일 것이다.
미국 학자 래니건(Lanigan, 1988)은 인간의 의식이란 자아(自我; Self)라는 그릇과 타아(他我; Other)라는 그릇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자아란 '나'라는 개념의 원천이 되고 타아란 '너'라는 개념의 원천이 된다. 이렇게 의식세계에서 공존하고 있는 '나'는 항상 빈자리로 남은 '너'란 그릇을 채워줄 수 있는 타인을 갈망하게 된다. 그것은 '나'와 '너'란 두개의 그릇이 시이소오의 양끝에 놓여야만 심리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상대자인 '너'가 부재하는 '나' 혼자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며 그래서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롭고 쓸쓸해지는 것이다. 사랑이란 '너'라는 그 빈 그릇을 채워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하고 안정된 사람이 나타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서양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이처럼 '나'를 완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서양적 사랑이란 다분히 자기 중심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나'보다는 '너'를 더 중시하는 희생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을 더 강조하는 사랑을 지고한 사랑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이란 감정상태에 빠진 연인들의 시간은 달콤하고 행복에 겨운 순간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이 많은 한국인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을 당연시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내몸 안에 있어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정의 위력일 것이다. 사랑으로 인한 희생은 표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괴로움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고통과 괴로움이기에 역설적으로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한국인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를 매우 소극적이고 감상적으로 만든다. 한국인은 "내가 사랑한 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든지 "내가 싫어 떠난 당신에게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식의 이성적 또는 합리적인 사랑 대신 "사랑하기에 당신을 보낸다"든지 "보내고 그리워한다"는 식의 감상적이고 역설적인 사랑에 더 익숙하다는 것이다.
소극적이고 감상적인 한국인의 사랑방식은 사랑의 표현마저도 매우 역설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행여 임에게 부담이 될까봐 마음의 아픔을 억제하면서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임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임을 번민케 할 수는 없다는 식의 희생정신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한국인의 역설적 사랑은 김용호 시인의 <역설>이라는 시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極과 極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 그렇게도 가까왔다.
언어의 패러독스를
하나의 진리로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불행으로 생각치 않는다.
회오리 바람이 뜨거운 정열을 몰아
그를 껴안을 기회를 갖다 주었어도
이성의 차디찬 단념의 칼날은
끝내 그이의 행복을 뺏지 않았다.
그이의 행복이란
모든 것에 가난한
내 앞을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최후의 이 자리에서
뒤끓는 심장의 고동을 땅위에 꽂았다.
새파랗게 질린 내 입술은
잠자리 날개처럼 떨렸으나
다음의 말은 뼈아프게 똑똑하였다.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는 역설적 사랑의 절정이다. 역설이란 '표현'과 그 '의미'가 상반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즉 "나는 당신을 사랑치 않습니다"라는 표현은 "뼈에 사무치도록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성의 차디찬 단념의 칼날은 끝내 그이의 행복을 뺏지 않은" 내적이고 정적인, 그러나 눈물겹게 진실된 사랑인 것이다. 자신의 연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가난한 자신이 "사랑"이란 명목으로 사랑하는 연인의 행복을 빼앗을 수 없다는 정서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이 사람에게 "극과 극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 그렇게도 가까운" 것이었다. 한쪽의 "극"이 '나'이며 다른 한쪽의 "극"은 '당신'이라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가난한 '나'는 '당신'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을 떠나보낼 수 있는 '나'는 '당신'과 너무나 가까운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4) 한국인의 이별 방식: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 "최초의 님"에서 "만나지 않는 것도 님이 아니오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라고 쓰고 있다. 사랑이 영원하다고는 하나 사랑도 하나의 인간사이고, 인간만사에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고 정들고 또 헤어지는 것이 어디 한 두 사람과의 일뿐이겠는가 마는 정들고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은 고통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정든 세월이 길수록 그리고 그 사랑이 깊을수록 연인과의 이별은 혼자 남는 이들에게 더 큰 외로움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 사랑하던 임과 이별한 사람에게는 사랑이란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눈물의 씨앗"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이별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면 더욱 섭섭하고 고통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민요 <아리랑>에서 "나를 버리고 가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고 노래하는 사람의 심중은 헤아리고도 남을 만하다.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러나 붙잡으면 나를 더 싫어할 것 같은 임, 그래도 언젠가 임이 다시 돌아와주기를 바라는 그 애절한 심정이 <가시리>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ꟁ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너 살라폁고
ꟁ리고 가시리잇고
잡꿁와 두어리 마鏁鏅
선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님 보내럓노니
가시鏅韕 도셔 오쇼서
믿어지지 않는 임과의 이별에 "가셔야만 합니까, 정말 나를 버리고 가셔야만 합니까"라는 원망 섞인 물음의 형식으로 된 이 노래의 첫번째 연에는 그 동안 정과 사랑을 생각해서라도 어찌 날 버리고 임이 떠날 수 있겠는가 하는 애틋한 호소가 담겨 있다. 두번째 연에서도 임이 떠난 후 주체할 수 없을 자신의 심정을 예견이라도 하듯 "당신 없는 세상을 나 혼자 어찌 살라고 나를 버리고 가십니까"하고 탄식하고 있다. 세번째 연은 속마음의 폭로이다. 떠나가는 가는 임을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기 짝이 없지만 혹시나 내가 잡음으로 해서 임이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네번째 연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독특한 한국적 정서를 보게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임을 보내기는 하지만 지금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시는 것처럼 다시 돌아와 달라는 말이다.
결국 이별을 이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 임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주리라는 기다림의 마음이 섬세한 언어로 조각된 노래이다. 김상선(1980)은 이러한 한국인의 사랑과 이별을 서양과 비교하여 "서양사람들의 사랑은 적극적이요 행동적으로 나타나는데, 우리의 옛 조상들의 사랑은 보다 소극적이요 정신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한국의 소극적이며 정신적인 사랑이 맞이하는 이별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나를 보기 싫어 떠나는 임이라면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고자 하여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깊은 정으로 맺어진 사랑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시의 주인공은 떠나가는 임과 이별에 직면해서도 차갑다고 할만큼 이성을 잃지 않고 있다. 냉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이 역겨워 떠나는 임의 앞 길에 진달래 꽃을 뿌려 놓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이성과 냉정의 이면에는 뜨거운 눈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것은 실제 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슬픔에 잠겨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가시리>와 <진달래>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한국인의 이별에 대한 정서는 떠나는 임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순수함과, 어차피 돌려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울며불며 매달리지 않겠다는 절제와, 깨끗하게 보냄으로써 정의 역사와 그에 대한 추억을 아름답게 만들어 임의 마음을 돌이켜 보겠다는 희망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이별을 그 관계의 종말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별 후에도 자신의 임을 향한 정은 지속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관계는 계속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그 정을 받아 줄 임이 가까이 있지 않다는 사실뿐인 것이다. 그래서 서운한 임을 전도에 꽃을 뿌려주면서까지 고이 보내드릴 수 있는 것이다.
5) 그리움과 한의 세월: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임은 쉽게 떠나도 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하던 임이 떠난 후에도 "혹시나"하는 기다림은 계속되며 이 기다림은 그리움을 낳는다. 그리고 이 기다림의 세월 동안 그리움은 점차 원망으로 바뀌게 되고, 이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그리움과 원망은 결국 한이란 정서를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으로 인하여 맺힌 한이란 "셜온님 보내럓노니 가시鏅韕 도셔 오쇼서"라고 애원하는 심정, 그리고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언약도 없이 그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마음 속에서 맺혀진 외로움과 고통의 이슬과 같은 것일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고 다짐하고 맹서했지만 어찌할 수 없이 떠난 임을 그리워하고 원망하다 결국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오는 것이 정한(情恨)의 눈물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민요 <강원도 아리랑>과 <정선 아리랑>을 중간에서 따 만든 <한오백년>의 가사를 보면 이러한 한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이창배, 1976).
후렴: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한 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백사장 세(細)모레밭에 칠성단을 ꆽ고 임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청춘에 짓밟힌 애끊는 사랑,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리.
한(恨)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 살겠네.
꽃답던 내 청춘 절로 늙어 남은 반생을 어느 곳에다 뜻 붙일꼬.
살살바람에 달빛은 밝아도 그리는 마음은 어제가 오늘.
나리는 눈이 산천을 뒤덮듯 정든 임 사랑으로 이 몸을 덮으소.
지척에 둔 임을 그려 살지 말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잊어나 볼까.
으스름 달밤에 홀로 일어 안 오는 임 기다리다 새벽달이 지샜네.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런가, 왜 이다지도 앞날이 암담한가.
....중략(中略)....
첫째 연,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情)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에서 우리는 한국적 연정의 절정을 볼 수 있다.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버렸을 때 당분간 실의에 빠졌다가도 그것을 결과로 받아들이고 다른 연인을 찾아보려는 것이 서양문화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라면 정의 문화 속에서 과정을 중시하는 한국인은 이별을 결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그리움의 눈물로 세월을 지새게 된다. 임이 떠난 것은 하나의 단면적인 사건이고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일 뿐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까지 쌓아온 정인 것이다. 정은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에게 연정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기까지 함께 해온 희노애락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인 만큼 임과 이별하였다고 해서 당장 없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통하여 쌓아온 정은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현실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듯하다. 바꾸어 말하면 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성적이며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의 속성이 바로 "지척에 둔 임을 그려 살지 말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잊어나 볼까"하는 마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떠난 임을 오랫동안, 길게는 평생동안 그리워하고 못 잊어 하는 것이 한국적 사랑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움은 한이라는 또 다른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루지 못한 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한은 제4장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이기 때문에 이 장에서의 논의는 이쯤서 접어둘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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